[논단] ‘순창객사’ 원래 이름표를 달아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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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순창객사’ 원래 이름표를 달아 주자
  • 양상화 이사장
  • 승인 2014.07.24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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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양상화 단군사상선양회 이사장
현재 걸려 있는 ‘순화아문(淳化衙門)’ 편액 대신 ‘순창객사(淳昌客舍)’를 나타내는 편액 설치 필요

모든 사물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구분하기 위한 이름이 있으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건물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일반적으로 건물 곳곳에 걸려 있는 ‘현판(懸板)’은 나무 판에 글씨를 써 건물에 붙인 각종 시문(詩文)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그 범위가 매우 넓으며, 건물의 이름표로 걸려 있는 현판을 특별히 ‘편액(扁額)’이라고 부른다.
한편 순창군청 우측 순창초등학교 안에 자리 잡은 ‘순창객사’는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순창 관아(官衙)의 유일한 건물일 뿐만 아니라 순창군의 역사와 군정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목조문화재이다. 객사는 고려시대 이래로 각 지방관아에 건립되어 지방관인 군수의 외빈 접대와 숙박 및 왕실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봉안하여 제례에 사용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건물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각 지역 대다수의 관아와 객사가 철거되는 수난 속에서도 다행히 순창객사는 정당과 동대청 건물만이라도 살아 남았다.
그런데, 현재 동대청 건물에 ‘순화아문(淳化衙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창객사’의 별칭이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마치 ‘경복궁 근정전’ 건물에 ‘광화문’ 편액이 걸려 있는 격으로 순창객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편액 대신에 전혀 엉뚱한 이름표가 순창객사 편액 행세를 하면서 걸려 있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순화아문’은 순창관아 입구 출입문 역할을 한 누각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편액도 당초 그 곳에 걸려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 왜 ‘순창객사’ 편액이 아닌 ‘순화아문’ 편액이 걸리게 되었을까? 일제강점기에 순창관아가 철거되면서 순창객사를 포함한 대부분 편액의 행방이 알 수 없게 되었고, 8.15 해방 후 찾을 수 없는 ‘순창객사’ 편액 대신에 마침 남아 전해지던 ‘순화아문’ 편액을 걸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앞으로 관광객들이 순창객사에 와서 ‘순화아문’ 편액을 보고 물어 볼 것이다. “순화아문이 무슨 뜻입니까? 순창객사에 왜 순화아문 편액이 걸려 있습니까?” 이럴 때 무엇이라고 답변해야 할까? “원래의 순창객사 편액을 발견하지 못하여 대신 순화아문 편액을 걸어 놓았습니다”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것보다도 후손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순창의 중요한 목조문화재가 왜 자기 이름표를 갖고 있지 못할까? 우리 조상들은 너무 문화재에 무관심하지 않았을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조선시대 당시의 ‘순창객사’ 편액을 찾아서 다시 제대로 걸어야 한다. 만약 조선시대 ‘순창객사’ 편액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현재의 명필을 모시고 새로 작명을 하여 써 달라고 하든지, 조선시대 간행된 책들에서 집자(集字)를 하든지 해서, 전주객사인 ‘풍패지관(豊沛之館)’처럼 순창객사 원래의 정체성이 고증된 편액을 달아야 한다. 우리 후손들과 관광객들에게 부끄럽고, 창피하지 않도록, 우리군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순창객사’ 편액을 다시 만들어 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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