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떽(54)/ 손 발 묶는다고 새벽닭이 안 우는 것도 아닌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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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떽(54)/ 손 발 묶는다고 새벽닭이 안 우는 것도 아닌디라~
  • 황호숙 황홀한농부
  • 승인 2014.12.05 14: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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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떽네 오지게 사는 이야그 54

우리나라 양심선언 제1호 인물  
                                    -박노해 시인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 중에
지금의 국방부 장관 격인 군부대신 이근택이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 앞에서
제가 앞장서서 을사조약에 찬성한 것이
무슨 자랑거리나 되는 듯이
「이제 우리 집안은 더 혁혁한 권세를 누리게 되었지」
뻔뻔스럽게 지껄였다는데

마침 그 집 찬모가 밥상을 올리려고 창 밖에 있다가
이근택의 말을 들으니 피가 거꾸로 솟아올라
부엌칼을 집어 들고 마루에 올라 소리쳤단다
「네놈이 그토록 악독한 줄은 미처 몰랐다!
그것도 모르고 네 종노릇하면서 밥을 빌어먹었으니
아이구 창피하고 억울해 못 살겠다」(중략)

끝내 나라가 망하고 온 백성이 시일야방성대곡 하고
순국자결이 줄을 잇는 먹구름 속에서도
이 얘기를 들은 민중들은 박장대소하며 후련해 했더란다

나는 이 찬모를 우리 나라 <양심선언 제1호>
인물로 삼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데 (생략)

지가 병원에 있음시롱 아조 편허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여라. 이녁들에게 큰 소리 뻥뻥 약조 혔듯이 태백산맥도 10권 다 일거 뿔면서 나름 공부도 겁나게 혔구만이라. 근디 이 시를 읽음시롱 빵 터져가지고 허벌나게 머릿속에 꽁쳐놨던 이야그들이 도망가버렸당께요. 재미지기도 허지만 송곳처럼 찌르는 부분이 자꼬만 유혹헝게 무담시 넘어갔제라.
어제부터 함박눈이 소복소복 내려불구만요. 잣나무에, 고추장 항아리에, 된장 항아리에도 함박눈은 싸목싸목 쌓여 가 뿔고 수국꽃 가지에도 휘영청 내리고 또 내리는디라. 괜시리 지가 순창에 처음 내려오던 해 겨울이 생각나는구만요. 1988년은 지가 통통한 몸매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홀홀단신으로 순창에 내려와서 농민회 간사를 시작한 해이구요. 1988년 5월에는 한겨레신문이 발간 된 해이제요. 쓰레기 같던 언론만 판을 치던 시절 보도의 금기와 성역을 부수고, 오직 사실과 진실에 입각해 기사를 쓰기로 결의하제라. <열린순창>과 비슷하당께요.
시방 지가 신문사를 홍보하려는게 아니고라, 1988년 가을부터 순창군 농민회 사무실을 개설하면서 맡은 업무가 농민회 일과 한겨레신문 배달과 띠지 쓰고 수금하는 일이었지요. 그 때는 농민회 사무실이 중앙로에서 순창 2교 다리로 가는 곳에 위치해 있었거든요. 지금도 그 쪽을 가다보면 주시하게 되구만요.
시방 생각건대 그 시절이 저 한테는 참 말로 따뜻하기만한 겨울은 아니었응게요. 처음으로 마주치는 농민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사랑이 요구되었었구요. 거기에 따라서 얄짤없는 헌신과 인내가 요구 되었제라. 농민 운동가로서 요구되는 능력들도 겁나게 허벌나게 많아서 힘에 겹기도 했제라. 봄에 이미 사람들에 대한 깊은 상처를 입어서 허우적거리던 겨우 솜털 벗은 24살이었는디 월매나 잘하겠어요. 그나마 한번도 해보지 않은 사무실 일에다가 그때는 고추 투쟁부터 나락 투쟁까지 일상적인 생존권 싸움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났제요. 사무실이 생기니까 농민회원들은 당연히 밤늦게까지 회의를 하고 토론을 하고 술 한 잔 허는 뒷풀이까지 하셨제요. 그때는 차가 없던 시절이라 쌍치에서 복흥에서 구림에서 풍산에서 모두가 부릉 부르릉 허는 오토바이 타고 모였거든요. 사무실 한켠 방에서 잠을 자며 숙식을 해결하였는디 워낙 초저녁잠이 많은 지는 꾸벅 꾸벅 졸음시롱 회의 기록하고 회원들 챙기고 뒷마무리 허는 작업까지 끝내야 했제라.
근디 중요한 것은  밤마다 중앙로 사거리에서는 격투씬이 벌어지고 술 취한 사람들이 사무실 문을 뻥뻥 차고 토하는 바람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당께요. 할 일은 태산 같은데 잠은 못자고  술기운은 남아 있어서 머릿속과 뱃속은 썩은 두엄더미 속 같고라. 무섭기도 허고 환장해불고 미쳐부러요. 거기다가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신문을 배달할 곳인 읍내를 챙겨야 쓰고 각 읍면에 나갈 띠지라는 작업을 써야 했구만이요. 우편번호부터 한 사람 한 사람 다 써야 되는 그 작업을 하다보면  오금이 엄청 재리고 손목마저 시큰 시큰 하제요.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울리면 배달 사고가 났다는 것이고 이미 학생들은 가고 없으니까 죽어라 뛰어서 배달해야 허지요. 그 다음부터 전화 울리는 것은 신문 논조가 맘에 안 든다고 끊어 불겄다고 호통 치시는 분 들이제요. 죄송합니다를 연신 외침서 전화기에 대고 머리 조아리고...
조금이라도 시간 나면 각 면 지역으로 버스 타고 물어물어 수금하러 가야지요. 조심성이 없는 지가 그때는 더했겄지요. 혹여라도 주머니에서 만원짜리가 빠져 버리면 코가 석자나 빠져서 지나온 길을 돌고 또 돌고 했었는디 부모님과는 연락을 끓고 사는 당시 월급이 3만원이었거든요. 후후후
<열린순창>과의 인연은 이때부터 이어졌을까라.
요새 일어나는 고소 고발 사건을 보다보니 워째 답답해지고 갑갑 허구만요. 군청이나 공공기관에서 보는 신문들을 못 보게 한꺼번에 끊어 분다고 했으니 이 글을 못 보시겠지만 나도 기자를 했던 사람으로 겁나게 쩨쩨하단 생각이 드요. 손 발 묶는다고 새벽닭이 안 우는 것도 아닌디라. 다른 지역 신문에 날까 걱정시럽구만요. 역사는 항상 발전하는 것인디 정윤회 사건보도 가지고 청와대서 여러모로 애쓰등만 워째서 대처 방법이 똑같다요. 따라 배우는 갑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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