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전주성 함락될 때, 창경궁은 잔치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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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전주성 함락될 때, 창경궁은 잔치가 벌어졌다’
  • 조남훈 기자
  • 승인 2016.07.20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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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부 시민모임 강의

 

▲지난 13일 청소년문화의집에서 열린 근현대사 강의에서 김재호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이 마이크를 잡고 있다.

역사공부 시민모임 “근현대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첫 강의가 지난 13일 청소년문화의 집에서 열렸다.
순창교육희망네트워크(대표 안욱환)가 주최한 강연은 김재호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을 초청해 매달 한 차례씩 진행된다. 첫 강연은 ‘동학농민혁명의 꿈과 좌절’을 주제로 농민봉기의 배경과 전개과정, 그 특성과 교훈에 대한 교양이 진행됐다.
김재호 지부장은 “동학은 순창과 연관이 없는 듯 보여도 연관이 있다. 피체지가 순창에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며 “단지 시대를 열심히 살았다는 이유로 죽은 사람이 많다. 동학기가 그랬다. 박근혜 시기가 나라도 아니라고 하는데 순종, 고종, 철종이 임금으로 있던 시기는 나라도 아니었다. 콜레라, 천연두 등 전염병으로 한 해 10만명 이상 죽은 해가 6번이나 됐다. 사람들로서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만인 시기였다. 역설적으로 이 시기 생산력은 늘어났다. 그런데도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시험에서 시험지 바꿔치기가 성행했고 심지어는 집에 가서 시험을 치는 경우도 있었다. 조상 중에 1700~1800년대에 관직을 했던 분이 있다면 80~90%는 가짜다. 공명첩으로 관직을 팔아먹는 등 완전히 썩었었다”고 말하고 “군역과 군정은 죽은 사람한테도 부과하고 이를 못 버텨 도망가면 옆집, 뒷집에서도 받아냈다. 세금이 면제돼야 할 노인이나 갓난아기한테도 매겨졌다. 정약용의 시, 애절랑은 세금 때문에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한 아버지의 모습을 목도하고 쓴 것이다”며 부정부패가 판치고 혼란스러웠던 시대가 동학의 배경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동학 사상의 특성에 대해 “정감록은 민중에 의해 쓰여진 책이고 단결이 핵심이다. 동학은 정감록에 있는 사상들을 비롯해 기독교 사상도 흡수했다. 동학은 후천개벽사상에 기대지 않고 자기 내면의 수양을 하면 이루어진다고 봤다”며 “초기 최재우의 동학은 만인진인설로 바뀌는데 누구나 진인이 될 수 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의 사상일 수도 있다. 동학은 이후 대종교, 원불교, 증산도에도 녹아있다. 사상의 상호침투가 생긴 것”이라고 해설했다.
그는 “전봉준에 대한 얘기는 봉초(신문기록)가 있어 꽤 나와 있는데 김개남에 대한 연구자료는 많이 없다. 그는 태인 종속리에서 잡혀 서울로 가다가 탈출 가능성을 우려해 전주 서교장(초록바위)에서 능지처참됐다. 남원, 무주, 장수에서 활동하던 김개남은 비타협적 인물로 심지어 남원부사도 말을 안 듣는다며 죽였다. 나중에는 일본군이 동학군을 잔인하게 죽였다. 수백 년 이어온 노비제도가 한 번에 바뀌니 울분을 표출한 것처럼 민심을 고민해야 한다. 김개남은 급진주의자로만 얘기되고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민심을 얻는 것이다. 동학군은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최후의 군대가 어떤 군대일지는 모르나 민심을 얻지 못하면 실패한다”고 말하고 “5월31일 전주성이 함락되던 날 조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 바로 그날 김옥균을 시해한 것을 축하하는 잔치가 창덕궁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는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는 삼례에서 2차 기포 후 우금티전투에서 패한 사실을 설명하며 아직 나라에 일본 잔재가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티’는 고개를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우금치 전투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우금티’가 맞다. 군산 중야마을은 마을을 측량하던 일본인 이름을 따서 한 것이고 이게 도로명주소에 들어가있다. 전주 동산리(동)는 미쯔비시 창업주의 호를 따서 만들어졌다”며 우리 주변에 남아있는 일본잔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금티 전투 당시 대패 원인으로 무기의 차이를 지목했다. 일본군이 미제 소총과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반면 동학군은 30초에 한 번 쏠 수 있는 화승총을 가지고 있었고 이마저도 비가 오면 못 쓰는데 전투 당시 비가 왔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군 명령서는 모조리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군대는 일본 예비군들이었다. 우금티전투는 싸움이 아니라 학살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은 청일전쟁과도 연관돼있다고 말하며 “동아시아 민중의 반외세 깃발을 든 것으로 보기도 한다. 동학군과의 전쟁 이후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민중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민간인학살이 자행된 것은 일본의 무차별적 학살에 그 기원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 지부장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은 군부정권에 의해 농락되기도 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을 만든 것은 박정희다. 5ㆍ16쿠데타가 동학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에 소복입은 여인이 등장했는데 전봉준의 딸이라고 했다가 후에 가짜임이 드러나기도 했다. 1980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참석했는데 이 때문에 정읍시장, 정읍경찰서장이 옷을 벗었고 준비위원장은 구속됐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을 성역화 한 게 전두환이었다. 아무나 갖다쓰기 좋았던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동학농민이 외친 척왜양창의는 지금도 필요하다. 사드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운데 여전히 우리는 외세의 간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반외세, 반봉건을 외쳤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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