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ㆍ18 민주화운동…광주항쟁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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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 민주화운동…광주항쟁 ‘바로알기’
  • 림양호 편집인
  • 승인 2017.05.18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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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37주년인 5ㆍ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비롯해 ‘꽃들에게 희망을’ ‘광야에서’ ‘상록수’ 등이 울려 퍼질 예정이다. 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를 지키려다 168명(정부 집계)이 목숨을 잃었고 5000여명이 다쳤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지 20년. 반란ㆍ내란 수괴 전두환ㆍ노태우가 처벌받은 것도 20년이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항쟁’을 ‘폭동’으로 ‘회고’하는 세력이 이 나라에서 숨을 쉰다. 전두환은 여전히 “5·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고 한다. 그는 “맨손에 태극기를 들고 ‘조선 독립만세’를 외친 기미 독립선언을 3·1 ‘운동’이라고 부른다”며 “빼앗은 장갑차를 끌고 와 국군을 죽이고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으로 국군을 사살한 행동을 3·1 운동과 같은 ‘운동’이라고 부를 순 없다”고 주장했다. 5ㆍ18은 시민의 궐기가 아니라 북한군의 선동이고, 자신은 ‘광주사태 치유 씻김굿의 희생자’다고 뻔뻔하고 비도덕적인 주장을 만천하에 주저하지 않고 배포했다.
대통령이 민중의 힘으로 바뀌고 9년 만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오늘 기념식에서 제창한다. 저들의 무치ㆍ무식을 이 나라에서 없애기 위해 ‘광주민중항쟁’을 바로 알고 바로 세워야겠다. 우리 민족의 자발적인 민중운동인 조선말기 갑오농민혁명, 일제강점기 3ㆍ1운동,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ㆍ19 학생혁명과 5ㆍ18 민주화운동을 바로 교육해 ‘자주통일, 평등세상’을 이룩해야 한다. 5월 18일은 1997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공식명칭은 ‘5ㆍ18 민주화운동’이다. 1980년 5월 18일은 광주에서 신군부에 맞서는 민주화운동이 본격화한 날이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피살되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전두환ㆍ노태우 등 신군부는 12·12 쿠데타로 군부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듬해 ‘1980년 봄’ 전국에서 계엄철폐,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8일 0시, ‘북한 남침’을 앞세워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계엄군은 장갑차와 헬기를 동원하고 시민들에게 총을 겨눴다. 소위 작전명 ‘화려한 휴가’에 따라 공수부대가 광주에 추가 투입됐다. 21일 계엄군은 전남도청에 모인 광주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했다. 54명이 숨지고 500여명이 부상당했다.
무차별 발포는 시민들이 ‘시민군’으로 바뀌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시민들은 광주ㆍ화순ㆍ담양 지역의 파출소 등에서 무기를 꺼내 광주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21일부터 26일까지 광주는 ‘해방구’였다.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5월 27일 새벽, 도심 곳곳에는 ‘최후의 저항’을 알리는 시민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계엄군은 새벽 4시경 도청 진압을 시작했다. 2001년 정부발표에 따르면 당시 사망자는 민간인 168명을 포함해 195명, 부상자는 4782명이다.
1980년 5월 광주를 제대로 전한 국내 언론은 없었다. 계엄사령관 담화문 내용 그대로 ‘불순분자 및 고정간첩, 이에 동조하는 불량배들이 벌인 책동’으로 규정했다. 광주로 통하는 모든 통신ㆍ교통수단이 마비돼 진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부역 언론은 ‘무정부 상태 광주 1주’, ‘광주시민 총을 든 난동자’로 보도했고,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며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고 적고 공동 사직서를 제출했다.
광주의 희생은 7년 뒤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여소야대 국회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국민들의 분노가 높아지자 전두환은 11월 백담사로 피신했다. 1992년 김영삼 문민정부를 출범시켜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로 이어온 30여년 군사정권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등 희대의 궤변이 이어졌다. 하지만 국민들의 거세진 여론은 1997년 ‘5ㆍ18 특별법’을 만들게 해 단죄했으나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대화합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특별 사면했다.
3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무차별 집단 발포를 명령한 자가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다. 5ㆍ18 광주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적폐청산’에 미적거린 결과가 전두환ㆍ이순자의 뻔뻔한 헛소리가 뉴스가 되는 세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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