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7)/ 첫여름
상태바
길위에서서(7)/ 첫여름
  • 선산곡
  • 승인 2017.06.08 14: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두운 밤이었다. 멀리 비쳐오는 자동차의 불빛에 낮게 드리워진 나뭇가지의 잎사귀가 투명해보이다가 이내 사라졌다. 사방은 다시 어두워졌고 어디선가 밤새 우는소리가 들려왔다.
 “너 그 자리에 있는 거지?”
내 마음자리를 확인하는 그의 물음은 힘이 없었다.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의 밀착을 애써 경계하는 마음이었다. 그가 힘들어 하는 것을 내버려두는 게 즐겁다는 야릇한 쾌감도 있었다. 이게 뭐야. 내 순수함은 이런 쓸데없는 감상으로 오염돼버렸다는 오기를 지닌 채였다.
천천히 그를 밀어내는, 내 첫여름은 그런 오기를 품고 있었다. 결국 그 오기가 상처가 되었다는 것도 모른 채 처음으로 맞았던 청춘이었다. 어둠을 배경으로 잠깐 비쳤다 사라지는 잎사귀의 투명한 빛은 이후로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단면이 되었다.
원래 복잡한 구조를 지닌 자기만의 경험들이 삶을 성숙시켜 나가는 것이지만 사랑도 이별도, 좌절의 아픔도 먼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더러는 천천히, 더러는 폭포수처럼 한꺼번에 쏟아지는 혼돈의 시작이었다. 60년대 말이었다.

 

첫여름이 되었다. 초여름이라는 말보다 좋다. 내 청춘, 그 달콤한 아픔의 날들로 돌아서게 하는 말이 첫여름이다.

꽃 이파리 스러지고 새잎새가 푸르르면
호젓한 오솔길에 훈풍이 분다.
첫 여름에, 첫 여름에 다시 만난 옛 사랑
아 그러나 지금은 메아리로 가고 없어라

문주란의 노래로 알고 있다. 이 노래는 라디오 연속극의 주제가였다. 그 무렵 들었던 연속극이었지만 지금 단 한 줄로도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다. 그러나 첫여름에 옛사랑을 다시 만났다는 노랫말은 그대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이별, 처음이었을 옛사랑을 다시 만났고 그리고 또 이별이라니. 원래 드라마는 해피엔딩이면 재미가 없다. 가슴 아픈 이별로 끝장을 내야 여운이 남는 법이다.
노래가 갖는 기억은 사람마다 다르다. 마치 자신이 그 노랫말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아픈 가슴 쓸어안는 착각도 한다. 사랑도 모르면서 사랑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첫사랑은 당연히 실패한 것처럼, 노랫말이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듯 한때는 시시했던 감정도 소중한 추억으로 변모시킨다.
내 청춘도 하마 그랬을까. 상처를 주고받았고, 미워하며 떠나버린, 누구에게나 있을 줄거리의 주인공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나는 한 때 잊고 살았다. 그 시시했던 일들이 결국 상처가 되어 나를 괴롭히기도 했지만 그것은 내가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했음을 이젠 알게 되었다. 오기가 낳은 상처였지만 상처 또한 오기를 낳기도 했던 것이다. 마치 경계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다시 첫여름이다. 그 푸름 앞에 내가 서 있다. 흘러간 유행가 가락에도 처절하지는 않지만 상처는 분명 남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다만 그 상처가 달콤할 뿐이다. 첫여름, 이 첫여름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순창 농부]농사짓고 요리하는 이경아 농부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이러다 실내수영장 예약 운영 될라”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