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9)/ 통증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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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9)/ 통증 이후
  • 선산곡
  • 승인 2017.07.13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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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 이후(痛症 以後)

풍경 녹음이 짙다. 먼 산 가까운 산 똑 같은 푸른색이지만 산에 담긴 푸름은 제 각각 빛을 띠고 있다. 이 계절을 푸르다(綠) 하지만 푸름(靑)은 아니다. 사방은 푸르지만 마음은 푸른 쪽빛(藍)에 가깝다.
혼자 듣는 ‘베토벤’의 소나타의 ‘비창(悲愴)’이 사뭇 비장하다. 피아노 건반에서 쏟아지는 현란한 소리는 푸른 물 뚝뚝 떨어지는 이 계절의 풍경과 닮아있다. 기막힌 비장미다. 풍경은 헛헛한 내 걸음 아랑곳없이 아름다울 뿐이다. 원래 아름다운 것은 야속한 것이고 야속하기에 슬픈 것이다. 아름다움은 그래서 슬픔을 지니기도 하는 것이다.

 

무심히 풍경을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범(凡)이요.”
범이다. 엊그제 상희를 보내는 기간을 거의 함께 했던 터였다. 자기 일처럼 함께 했음을 위로하는 의례인줄 알았는데 근처에 와 있다는 말이었다. 그 동안 벽에 갇혀 있다가 순간적으로 해방되는 기분이 들었다. 한바탕 큰일을 치른 뒤의 무력감도 잊고 먼 길을 찾아 온 이유를 어쩌면 알 것만 같았다. 나는 갑자기 활기에 차고 바빠지기 시작했다.
곧장 만날 장소를 알려주고 창밖을 보니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하고 있다. 비라도 오려는가. 그래. 떠난 사람은 떠났고 우리는 아직 이 자리에 남아 있다. 남아있는 사람들 중 범이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위로다. 저 풍경에 비가 적시는 것 또한 좋은 위로가 될 것이다.
약속한 식당에 범이와 은호를 함께 만난다. 잘 빚어놓은 듯한 범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흐뭇하다. 상희를 보낸 뒤라서 그런지 나이에 걸맞지 않는 애린도 섞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범이와 나의 남다른 우애를 누구는 질투하기도 했지만 우리사이는 ‘무관심 같은 서늘한 애정’을 가진 사이라는 게 정답이다. 이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안도, 그 때문에 순간 마음이 울컥해졌지만 범이도 은호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식당 방에 방석이 없고 바닥에 머리카락이 보인다는, 보통사람들이 지극히 무심했던 일에 범이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있다.
“저 사람 사업할 때 직원들이 저 짓 때문에 많이 그만 두었을 거요.”
범이가 사업주였을 때 깐깐했던 일을 은호는 직설적으로 내게 말했지만 나는 그러한 범이의 결벽증이 좋다. 그 완벽한 청결함은 그의 생활방식일 뿐이다. 결벽증은 그의 힘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분명한 관념 때문에 가끔 진땀을 빼지만 그래도 좋다. 땀을 흘리며 범이도 은호도 저녁을 잘도 먹었다.
“어제가 삼일 짼가.”
혼잣말처럼 내가 중얼거렸다. 둘 다 대꾸가 없었다. 상희가 가버린 것에 대해 관심 없다는 듯 처음부터 범이는 건성이었다. 평소에 상희에게 비판적이었지만 속으로는 마음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모를 리 없다.

비가 내리고 있다. 범이와 은호를 배웅한 뒤 나는 차안에 그냥 앉아있었다. 차창에 얼룩진 빗물을 지우기 위해 와이퍼가 움직인다. 빗방울에 이내 창은 흐려지고 다시 와이퍼는 반원을 그린다. 지우면 얼룩지고 얼룩지면 지우고. 이 반복은 우리들의 마음을 닮은 것인지 모른다. 인생이란 아마도 저런 것. 지우고 얼룩지는 끝없는 반복을 위해 우리는 자기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살아야 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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