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11)/ 음주에 대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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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11)/ 음주에 대한 변명
  • 선산곡
  • 승인 2017.08.10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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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분자액 약간에 차가운 물을 부은 컵에 얼음 한 조각 넣더니 티스푼으로 가볍게 젓는다. 권한 사람의 말로는 달지 않아서 좋단다. 별 생각 없이 마신 뒤였는데 얼굴이 화끈거려온다. 다리에 힘도 빠지는 것 같다. 술이었기 때문이었다.
“몰랐어요.”
음료라며 권했던 사람이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나 말고도 그렇게 마신 사람들이 많았던 듯, 주변에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어쩐지, 어쩐지’였다. 그들 모두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으면서도 가벼운 취기를 그냥 넘긴 모양이었다.
음료인지 술인지 구분도 못하고 벌컥 마신 것은 주정의 희석 때문이라기보다 전제를 고정시킨 관념 탓이다. 술이었다면 대부분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달지 않은 음료’라 하니 그냥 마신 것이다. 아무튼 생각 없는 아침술을 마셨지만 그런 취기는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술을 제법 마셔왔지만 몇 가지 체질로 굳어진 것이 있다. 혼자 안마시고, 아침에 안마시고, 집에서 안 마셨다. 그래야 했던 이유는 따로 없다. 평소 음식을 핑계로 한 반주(飯酒)는 물론, 깊지 않게 마시는 한두 잔의 술은 대부분 사양해왔다. 분위기를 마신다(?)고 자처해 왔으니 자작(自酌) 아닌 대작(對酌)을 즐긴 셈이다. 거기에 기분 나쁘면 술이 마셔지지 않는 체질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캠핑을 갔을 때 가끔 아내가 술을 마시자고 한다. 물론 맥주 캔 몇 개 챙겨간 것이지만 아내가 사정을 해야 겨우 마시는 시늉에 그친다. 캠핑을 할 때 분위기를 살려보자는 의도를 모를 리 없지만 아내는 원래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다. 그런 아내와는 대작의 묘미가 생기지 않는 탓이다.
그런 자제력을 지니고 술을 마셔왔다지만 취하면 분명 실수도 하기 마련이었다. 호연지기도 아닌데 그 실수 이야기들을 모아 ‘끽주만필(喫酒漫筆)’이라는 이름으로 책도 냈다. 큰 용기였다.
아버지는 평생 소주만 드셨고, 안주 별로 안 드셨고,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으셨다. 늘 평정(平靜)하셨던 모습에서 단 한 차례도 어긋난 적 없었으니 아버지의 영향을 내가 받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아버지께 죄송했던 마음이 든 것은 그 책을 쓴 뒤였다. 책머리에 세상 사람들 앞에 ‘용서 하소서’ 했지만 실은 아버지께 드려야했던 말씀이었던 것이다.
오늘로 술잔 잡아보지 않은 지 석 달이 가까워온다. 금주도 절주도 아닌, 무음의 날은 더 이어질 것이다. 특별한 일 없는 이상 그냥 견딜 수 있다. 아니 견디기보다는 무심히 흘러가겠지. 간절히 마시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이틀 연속 마실 체력은 되지 않았으며, 그저 술자리 즐거워한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술에 약하다’는 내 음주의 변명은 이웃들에게 별로 통하지 않아 보인다.
나는 아직도 아내에게 ‘평생 술을 마셨다’는 구박을 듣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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