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13)/ 오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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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13)/ 오디주
  • 선산곡
  • 승인 2017.09.0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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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가 끝났다. 해는 길었다.
“장구 싣자.”
피트에게 한 말이었다. 오후, 짱짱히 남은 시간에 들놀이 가자는 소리인줄 눈치 빠른 그가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눈 찡긋하는 신호에 정태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 사람에게 자주 있는 벼락치기 야유는 원래 계획되지 않았다. 그저 느닷없고 간단하게 노는(?) 일이 ‘장구 싣자’는 말로 표현되는 것뿐이었다.
운장산 아래 낮은 계곡에 세 사람이 자리를 잡았다. 농가와는 멀리 떨어졌지만 혹시나 들일하는 농부들에게 방해될까봐 멀고 깊게 잡은 자리였다. 탁족(濯足)의 시원함을 곁들여 펴놓은 술자리는 소주 댓 병에 포(脯) 한 봉으로 간결했다.
정태가 단가(短歌)를 불렀다. 몇 달 걸려 내게 ‘사철가’를 배워낸 소리 실력이 장구 소리에 풀어지고 있었다. 혹 틀릴 까 추임새 삼아 ‘하나, 둘’ 구음(口音)으로 짚어주는 박자에 오랜만에 정태의 단가가 신이 나 있었다.
“나도 성한테 배워야 쓰겄는디.”
‘헐 일을 허면서 놀아보세’ 로 정태의 소리가 끝나자 부럽다는 듯 피트가 중얼거렸다. 몇 잔 술 더 들어 취기가 오르고, 부르는 노래 소리에 맞춰 장구 채편에서는 장판에 콩 구르는 듯한 소리가 났다. 피트가 제자리에 앉아서 하는 춤사위 손짓은 어깨보다 높은 머리위에 올라와 있었다.
취흥이 한층 무르익을 때였다. 우리들이 앉아있는 계곡 위쪽에 인기척이 일었다.
“실례혀도 될랑가 모르겄소?”장구소리가 멈췄다. 셋이 올려다보니 밀짚모자를 쓴 농부 하나가 새까만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시끄럽다는 핀잔이나 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는데 농부가 경우지게 모자를 벗어들었다.
“일 허다 들응께 장구소리가 어찌 좋던지…”
그냥 와 봤다는 것이었다. 
우리들 셋이 한꺼번에 신이 나 내려와 함께 앉기를 권했다. 농부가 내려와 피트가 권하는 술 한 잔 마시더니 바위 위에 깔린 술판을 살피는 눈치를 보였다.
“잠깐 계싰소 잉.”
내려왔던 바윗등을 거슬러 농부가 황급히 올라갔다. 우리 셋이 농부의 뜻을 짐작하며 해롱거리고 있던 얼마 후였다. 아니나 다를까, 시커먼 먹물 빛 플라스틱 술병을 든 농부가 나타났다. 술이 바닥난 것을 눈치 채고 집에 가서 가져온 듯했다.
“오두개 술이어라우.”
집에서 담갔다는 오디주였다. 농부의 뒤를 따라오는 순박해 보이는 여인이 아마도 그의 부인인 듯했다. 뜻밖에 부인이 무겁게 받쳐 든 쟁반 위에 펄펄 끓는 매운탕 투가리가 놓여 있었다. 함께 앉기를 권했지만 부끄러운지 잠시 후 아낙은 자취를 감췄다.
농부가 가져온 술조차 바닥이 났다. 운전을 해야 하는 피트를 빼 놓고 함께 마신 술이 제법 많은 양이었다. 어느덧 해는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나 이날 생전 오늘 같이 재밌었던 날은 처음이여라우.”
하얀 이를 내놓고 웃는 농부의 얼굴이 너무도 순박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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