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보물여행(27) 김병로 대법원장이 태어난 곳을 따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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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보물여행(27) 김병로 대법원장이 태어난 곳을 따라 걷다
  • 황호숙 해설사
  • 승인 2017.10.12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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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떠나는 ‘순창보물여행’

 

▲복흥 하리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법조인, 가인 김병로 선생 생가터를 알려주는 안내판.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
“정의를 위해 굶어 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 법관은 최후까지 오직 ‘정의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

 

위대한 인물이 날거라는 예언대로 복흥 하리마을에 인물이 났으니 바로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입니다.
낙덕정에서 생가 반대쪽으로 쭉 가면 바로 대법원 연수관입니다. 가인의 정신을 기리고 사법부 구성원의 교육 및 수양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답니다. 1층 전시관에 판결문들과 남겨진 유품, 영상물, 사법 역사를 담은 각종 자료들과 흉상 등이 전시되어 있고, 가인 생가 길을 따라 벽화랑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을 신고 종횡무진 사법부의 독립과 기틀을 다지느라 뛰어다닌 가인을 서울법대 최종고 교수는 “이 나라 사법의 틀과 뼈대를 세워 놓은 터주요, 어른”이라고 평가합니다. 가인은 1888년 1월,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컴퓨터에서 검색하면 엄청 많은 자료들이 나오고 책도 많습니다. 가인에 대해서는 교육방송(EBS) 지식채널 ‘대법원장의 말’ 편으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여기 대법원 연수관은 전주, 광주, 서울 등 법원 종사자들이 많이 다녀가면서 해설을 요청해서 자주 왔는데 아주 소박한 곳입니다.

최익현 휘하 청년 의병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무료 변론하고
대한민국 대법원장이 되기까지

어린 시절을 외롭게 지냈지만 복흥 낙덕정에서 열심히 수학했던 가인은 열혈청년으로 자라,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체결 되었을 때 최익현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18살 나이로 의병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강제 해산 후 20세때 70여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다가 채상순이 끝까지 싸우다 죽자 큰 감명을 받았는데 매서운 토벌작전 때문에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가인은 계몽운동과 자강운동 쪽으로 눈길을 돌려서 담양 창평에 있는 창흥의숙에 입학했습니다. 신학문의 열기 속에서 평생의 동지들을 만나고 일본 땅으로 건너가서 변호사의 꿈을 꾸었습니다. 후에 “일정의 박해를 받아 비참한 질곡에 신음하는 동포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하려고 변호사가 되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가인은 일제의 폭압에 맞서 싸우는 모든 약자들과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을 무료 변론하고 가족까지 돌보았습니다. 아! 새들이 좌우의 날개로 날듯이 다채로운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해서인지 이인ㆍ허헌 선생과 함께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불렸습니다.
가인 생가를 나와 걷다보면 오른쪽 두렁을 따라 일생을 청렴하고 꼿꼿하게 살아간 자신의 모습과 닮은 수선화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대법원장 재임 9년 3개월 동안 가인은 사법부 밖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부 독립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친일파 처벌에 소극적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반민족주의자의 신속한 처벌을 주장한 가인은 그 마음고생 때문인지 6ㆍ25 전쟁시절 다쳤던 다리를 절단하게 됩니다. 이승만은 사표 제출을 요구했지만 가인은 의족을 짚고 등원했습니다. 한번은 이승만 대통령이 법무부장관에게 “요즘 헌법 잘 계시는가?” 라고 물었는데 장관이 알아듣지 못하자 재차 “대법원에 헌법 한 분 계시지 않느냐”라고 물었답니다. 가인을 지칭한 것입니다.

가인은 1954년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은 헌법에 어긋난다며 이승만을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이에 이승만은 국회 연설에서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며 사법부를 비난했고, 가인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라고 맞불을 놓았다는 일화는 속을 뻥 뚫리게 합니다.
벽화에 잉크가 그려져 있는데 왜 일까요.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나라의 살림이 넉넉지 못했던 시절인데 한 법관이 쥐꼬리만한 월급을 견디다 못해서 가인을 찾았다가 아무 말도 못했답니다. “나도 죽을 먹고 살고 있소, 조금만 더 참고 고생합시다!” 담배 한 개비를 두 토막으로 잘라 피우고 점심 도시락을 갖고 다니고, 비싼 기름 대신에 톱밥으로 난방을 하니 그런 추위에 잉크도 얼어 터진 것이지요. 몽당연필을 모아 놓은 조각상은 그래서 만든 것입니다. 청렴의 샘은 가인의 청렴하고 맑은 샘의 이미지를 비유해 표현했다고 합니다.
작년에 서울 도봉구문화원에서 견학을 왔는데 도봉구에 가인길, 가인초등학교, 가인지하차도 등이 만들어져 있다고 합니다. 가인은 1932년 신간회 해체후 사상사건 변론에서 제한을 받자 지금의 도봉구인 경기도 양주로 내려가서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일제가 주는 배급도 받지 않는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위대한 인물을 한 지면에 해설하다 보니 빠진 게 많아서 서운합니다. 가인 생가에서 만나 못한 이야기는 나누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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