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16)/ 이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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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16)/ 이 가을에
  • 선산곡
  • 승인 2017.10.26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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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우거(寓居)에, 있는 책을 전부 옮기기로 했다. 웬만한 책은 이중으로 꽂을 수 있는 칸막이책장을 미리 주문하여 설치했다. 그 동안 집안 곳곳에 쌓여있는 책의 양도 엄청난 것이어서 이삿짐센터를 부르자니 그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올 때 짐을 싸던 이삿짐센터 젊은이가 내가 듣는 줄도 모르고 책 많은 것을 불평하고 있었다. 그것도 쇳소리가 나게 육두문자를 써가면서였다. 젊은이는 무색한 듯 낯을 붉혔고 나는 못들은 척 얼른 자리를 피했지만 아무튼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제일 싫어하는 물건이 책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결국 쉬엄쉬엄 내가 직접 옮기기로 했다. 장기간 계획을 세워 천천히 보따리 싸기를 시작했는데 그 일이 만만치 않은 중노동이 되어 버렸다.
보따리를 살짝 묶어 책이 쏟아졌을 때의 낭패는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그래서 보따리가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매듭을 지어야하는 일도 버거운 일인데 그 보따리를 일일이 들어 날라 차에 차곡차곡 실어야한다. 실어간 책 보따리는 시골집 계단을 통해 다시 날라 그 매듭을 풀어야했다. 언제는 풀리지 않게 단단히 얽어맨 매듭이었는데 이제는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목적을 위한 수단과 결과를 놓고 생각해보니 이것이 인생인가 싶기도 했다. 아무튼 그 책들을 다시 분류하고 정리를 해야 하는 일이 남아있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단순할 줄 알았던 이 중노동의 반복이 해를 넘겨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집안 곳곳, 빈자리면 켜켜이 쌓여있었던 책들이 조금씩 허물어지자 뒷 베란다 한 곳에 문조차 열수 없었던 책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책장 위에 천장과 맞닿아 있는 수상한 상자가 몇 개 눈에 띄었다. 분명히 내가 올려놓았을 텐데 기억나지 않은 저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애써 챙겨놓고 잊어버리는 것들이 다반사라, 힘들게 내려 열어보니 뜻밖에 40여 년 전에 열심히 구독했던 주간독서신문철이 들어있었다.
무슨 갈증이었는지 군인이었던 시절까지 열심히 구독을 했다. 부대막사 한쪽에 깊숙이 감추어 보관해온 추억이 엊그제 같다. 이후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나, 종이는 낡아 변색되었고 활자이 크기는 오늘날 신문보다 작기만 하다. 버리라는 성화를 피해 높이 피신시켰던 저 덩치 큰 신문철, 시간이 날 때마다 돋보기안경을 쓰고 화경(火鏡)을 덧대어 다시 읽어보는 재미가 붙었다. 강산이 몇 번 변했어도 문학, 예술, 철학, 역사 등을 논했던 당시 학자들의 문맥은 오늘날에도 버릴 것 하나 없이 빛을 발하고 있다.
비록 묵혀있을지라도 하나도 버릴 수 없는 문자의 향(香), 오래된 신문이거나 낡아버린 헌 책이거나 모두 다 사고(史庫)의 보물처럼 귀중한 자료들이다. 다시 읽어도 새로운 감동을 주는 글에 취해 이 가을을 보내면서 문득 그 옛날의 정열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진리는 그대로인데 세월은 이렇게 흐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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