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19)/ 천천히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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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19)/ 천천히 걷는다
  • 선산곡
  • 승인 2017.12.07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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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걷기가 중요한 일이 되었다. 시내버스 한 정거장 정도의 거리에 있는 이발관도 차를 타고 갔던 일을 회상하면 참 어처구니없었다는 후회도 했다. 걷기가 최고의 운동임을 실감하기까지 내게 주어진 신체 증상들이 퇴행성이라는 것도 동시에 얻은 진리다. 이제 등산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고, 계단 오르내리기조차 버겁다는 자각은 서글픈 현실이 되어버렸다.
충분히 걷기 위해 시간을 넉넉히 잡는다. 1년에 한 번 만나는 모임, 제법 먼 거리에 만남의 장소가 있다. 도심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다. 문득 빌딩숲 위 하늘을 바라보니 어둠에 젖기 전 남청빛이다. 계절은 이미 한 겨울의 복판에 있다. 이 거리에 눈이 왔으면. 바람에 날리는 눈, 어둠을 배경으로 불빛들은 그 눈발의 율동을 선명하게 보여주겠지. 눈과 바람과 어둠과 빛의 조화를 보고 싶지만 지금 눈은 올 것 같지 않다.
길을 건너기 위해 건널목 앞에 선다.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졌다. 맞은 편 네거리 모서리에 자리 잡은 커피 집이 보인다. 넓은 유리창 안에 사람들이 앉아있다. 그 한쪽 구석에 관엽식물 잎사귀가 파랗다. 지금 겨울인데 계절을 잊은 식물들은 자연의 섭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저렇게 빛을 내는지 모를 일이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유리창 안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 중에 혼자 앉아있는 사람의 모습에 작은 미소를 보낸다. 커피 집에 앉아 있기는 혼자여도 좋다. 소란한 술집은 혼자를 반기지 않지만 커피 집에서의 혼자는 묘한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누구도 방해하지 말라는 침묵 같은 분위기는 사람보다 하얀 커피 잔 하나에 더 어울릴 수도 있다.
오랜만에 만날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새삼스럽게 올 사람이 누구누구일까를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세기를 한다. 온다는 사람, 오지 못한다는 사람이 누구누구였던가. 세월의 흐름이 이제는 만남의 대상도 자연스레 정해버린 듯하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버린 사람이 여럿이라는 공허함도 지울 수 없다. 누구는 이 만남에 스스로 발길을 돌리는 길을 택했고, 누구는 참석할 수 없다며 없는 이유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한때 이웃이었노라고 다짐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흩어졌고 대부분 직장도 퇴직을 했다. 돌이켜보면 가장 화려했던 청춘과, 가장 아팠던 사랑과, 가장 어리석었던 꿈을 지녔던 때 만난 사람들이었다. 이젠 지난날의 정리도 열정도 세월 따라 식어버린 자리에 서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한해에 한 번씩이나마 만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만들어 두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
파란불이 켜졌다. 함께 걷는 사람도 없는 건널목을 천천히 걷는다. 길을 건넌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내게도 고비마다 건너야 했던 길들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참 힘든 한 해였다. 어서 이 해가 지나갔으면, 크고 작은 이 고통도 지나가리라는 막연한 기대는 새로운 희망에 거는 욕구의 반증이다. 그렇게 해마다의 나이테를 쌓아온 것이 인생이었을까.
올해, 유학을 갔던 딸아이가 무사히 귀국 했고, 내 수술 경과가 후유증 없는 것도 다행이었다. 차마 인력으로는 거부할 수 없는 상사(喪事)도 있었던 한 해, 이 한 해는 언젠가 기억 저편의 일로 접혀지겠지. 아직 나는 인생의 파란불 길을 간다. 스스로 되 뇌이며 천천히 길을 건넌다. 일부러 천천히, 천천히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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