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보물여행(30) 훈몽재에서 하서 선생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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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보물여행(30) 훈몽재에서 하서 선생을 만나다
  • 박재순 해설사
  • 승인 2017.12.07 14: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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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떠나는 ‘순창보물여행’

 

▲호남 사람으로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 선생이 세운 강학당 ‘훈몽재’에 눈이 내린 모습.

어느새 성큼 다가온 겨울, 하얀 눈을 바라보며 한 해를 돌아보는 요즈음입니다. 오늘은 호남 사람으로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하서 선생님을 만나러 훈몽재로 가보겠습니다.

 

 

훈몽재(訓蒙齋)는 하서 김인후 선생이 세운 강학당입니다. 하서 선생은 1510년 전남 장성 맥동마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사물에 대한 이치를 터득한 글들을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답니다. 다섯 살 되던 해 어느 날, 하서 선생이 생파를 하나씩 하나씩 벗기며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음식의 재료를 가지고 장난하면 못쓴다!”라고 아버지께서 나무라자 “사물의 이치를 알아보고자 그리했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10살 때는 전라도 관찰사로 내려온 김안국을 스승으로 모시고 소학을 배웠으며, 김안국이 ‘나의 어린 벗’이라고 칭하며 아꼈다고 합니다. 하서 선생의 사상에 영향을 준 기묘명현들도 이때 만났다고 합니다. 19살에는 오늘날로 따지면 서울대학교인 성균관에 들어갔고, 21살에는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됩니다. 이 때 퇴계 이황과 교우하며 당대 조선 성리학의 두 거장이 만나게 됩니다. 31살에는 과거에 합격하여 김안국의 천거로 정치에 입문하게 됩니다. 34살에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면서 세자시절 인종을 만나게 됩니다. 생후 칠일만에 모친을 여윈 인종은 문정왕후를 친모로 알고 자랐고 친모가 아닌 것을 알고도 효심이 남달랐다고 합니다.
성군의 자질이 충분했던 인종과 죽을 때까지 의리를 지켰던 하서 선생과의 만남. 오늘날까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인종이 하서선생을 얼마나 따르고 좋아했는지 직접 대죽을 그린 묵죽도를 주었고 선생은 묵죽도에 답시를 적어 인종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뿌리가지 잎새마디 정미롭고
굳은 돌은 벗인양 범위 안에 들어있네
성스런 우리 임금 조화를 짝 지으사
천지랑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시네

하서 선생은 중종에게 정치를 잘하는 군주는 어진 인재를 가까이 하고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는 일에 힘썼다며 기묘사화로 희생된 기묘명현에 대해 신원을 복권시켜줄 것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중종이 불쾌하게 받아들이고 또한 인종의 외척인 대윤 윤임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 윤원형 간의 당파싸움을 보면서 노부모 봉양을 핑계로 옥과 현감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러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새 임금을 도와 도학정치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두 외척간의 세력싸움이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인종의 탕약까지 문정왕후가 관리하는 것을 보고 본인이 나서서 인종을 챙기려하였으나 그것마저도 거절당하자 이에 환멸을 느껴 다시 옥과로 내려오게 됩니다. 인종이 임금이 된 지 8개월 만에 승하하자 옥과 현감직도 내려놓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가 정계에 발을 딛지 않습니다. 인종은 죽기 이틀 전에 기묘명현들에 대한 신원을 복권합니다. 하서 선생은 명종이 여덟 번이나 불러 들였지만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답니다. 정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저지만 이런 절의를 지키며 정치하는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명종의 부름이 계속되자 봄꽃 떨어지는 늦은 봄에 부모와 처자식을 거느리고 처가가 있는 쌍치 점암촌으로 들어옵니다. 이 때가 1548년 명종3년입니다. 초당을 짓고 후학들 가르치는 일로 세월을 보내는데요. 변성온, 기효간, 양자징, 정철 등이 하서 선생에게 유학을 배우기 위해서 몰려듭니다.
양자징은 소쇄처사로 알려진 양산보의 아들로 하서 선생의 사위였습니다.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도 어릴 적에 수학하였으며 나중에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해 와서 하서 선생께 가르침을 받았던 바위에 대학암(大學巖)이라 새겼다고 합니다. 훈몽재 앞 쪽으로 흐르는 추령천 가장자리에 20여명이 앉을 수 있는 널따란 바위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서 선생은 훈몽재에 머무르며 천명도(天命圖)를 완성하셨답니다. 천명도는 16세기 중엽 조선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작성된 그림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는 이상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원리를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을 말하는데 이황과 기대승도 이 천명도를 남겼습니다.
하서 선생은 점암촌에 있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갑니다. 선생은 매년 인종의 기일인 음력 칠월 초하룻날에는 마을에 있는 난산에 들어가 하루 종일 곡소리를 내며 지냈다고 합니다. 51세를 끝으로 생을 마감한 선생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사후에 옥과현감 이후로는 어떠한 작훈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훈몽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렸으나, 하서 선생의 뜻을 받들어 5대 후손인 자연당 김시서가 복원해 강학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은 하서’라고 불렸답니다. 1827년 어암서원(漁巖書院)이 건립되어 하서 선생과 자연당 김시서, 송강 정철, 율곡 이이를 배향하였으나 여러 폐단의 온상인 서원을 철폐하라는 흥선대원군의 명에 따라 훼철(헐어서 치워 버림)되었습니다. 순창군에서는 2003년 훈몽재 복원사업을 추진해 2005년에 전주대학교에 발굴조사를 의뢰하였고 2009년 복원을 완료하였습니다.
선생의 고향인 장성에는 현종 때 필암서원이 세워집니다.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모두 갖춘 이는 하서 한사람뿐이라며 정조가 문묘에 배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훈몽재에는 단국대학교에서 정년하고 강원도 산중에 ‘산동서당’을 짓고 강학을 열었던 고당 김충호 산장님이 하서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순창군에서는 올해 백방산 자락에 목책으로 산책길을 만들었습니다. 마음의 휴식을 원하시면 조용히 하서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훈몽재 선비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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