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20)/ 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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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20)/ 통음
  • 선산곡
  • 승인 2017.12.21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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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음(痛飮)

‘후래삼배(後來三杯).’
술판이 어우러진 자리에 늦게 참석하는 사람에게 잔 권하며 흔히 쓰는 말이다. 석잔, 삼배의 의미는 늦게 온 사람에게 취기를 빨리 끌어당겨 좌중의 취흥에 맞춰야한다는 강압의 의미도 있다.
우리에게는 그 삼배보다 더한 독특한 일배(一杯)가 있었다. 뚝배기 하나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 한꺼번에 마시는 방법. 언제 한 잔 씩 깔짝거리겠느냐, ‘통 크게 한잔’이라는 의미였다. 억지로 이름 붙이자면 후래통일배(後來桶一杯).
무슨 위세랍시고 숨고르기를 한 뒤 후래통일배를 몇 번 마신 적이 있었다. 뚝배기 한 사발을 들이키고 나면 관자놀이가 띵하고 눈앞이 노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무렵 생맥주 1,000cc를 단번에 들이킨 적도 있었다. 멍청스럽게 한 잔 마셔내는 내 모습을 보고 뻔니성이 눈을 껌벅거리면서 핀잔을 했다. 
“창시(腸)자랑이냐?”
조선시대 세종 조에 병조판서 윤회(尹淮)와, 집현전 직재학 남수문(南秀文)은 천하에 알아주는 술고래였다. 세종이 이들의 재주를 아껴 하루에 술 석 잔 이상은 못 마시게 했다. 그러나 연회 때 그들이 마시는 술잔은 요즘 말로 양판처럼 컸던 모양이었다.
“덜 마시게 했던 것이 더 마시라 권한 것이 되었구나.”
세종이 큰 잔 석 잔만 마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웃고 말았다고 한다.
석 잔을 넘기지 않았지만 양껏 술을 마신 그분들의 멋과 재치는 따라갈 수 없어도 통음(桶飮) 아닌 통음(痛飮)의 매력은 분명히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열혈의 객기. 요즘 주객들에게 자랑꺼리는 못되지만 그렇다고 주눅들 일도 아니다. 한 시절의 풍류는 그들만의 것이다.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금주라는 말이 별로 없었던 시절이었다.
남이 먹여주는 술을 입으로만 마셔본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 술을 나는 많이도 마셨는데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고향의 선후배들이 크게 어울려 가무(?)를 즐길 때면 거의 다 반주를 내가 맡아야했다. 기타를 치거나, 북을 치거나, 상다리 젓가락 장단이라도 다른 사람은 손을 놓아야했다. 장단을 치는 두 손이 노는 흥취를 깨지 않도록 운동(?) 중일 때 술 한 잔 따라 먹여주는 담당자가 있었다. 잔 기울기 늦으면 목이 빠지고 너무 빠르면 당연히 사레가 들 것이다. 숨고르기에 맞춰 삼키는 속도도 중요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그 담당을 할 수 없었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도록 내게 술 잘 먹인(?) 최고의 기술을 가진 자가 몇 있었다. 그 기울기의 적당함, 그 한잔을 원하는 순간을 알아차린 희열. 최철산(崔吉錫)이 최고의 도사요, 이미 고인이 된 이관평이 둘째다. 잔 권(?)하는 타이밍이 절묘했던 사람들의 정취라니. 그 맛에 술도 마시는 것이다. 물론 억지로 마셔야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저도 해보겠다고 내게 술잔 입에 물렸다가 혼이 난 사람도 있었다. 술잔을 너무 느리게 기우린 바람에 목을 빼다가 결국 얼굴을 흔들고 내가 소리를 지른 것이다.
“야잇! 이 잡놈아, 이놈아!”
장단이 멈추어 지고 서로 낄낄대는 순간 술잔 든 녀석 머리에서 따악 소리가 났다. 최철산이 친구인 강사정 뒤통수를 올려 친 것이다.
“얏쓱아! 아무나 허는 줄 아냐?”
그렇게 마셔왔던 술, 즐겁지 않은 술자리가 어디 있을까마는 내 고향 다락회원들처럼 놀기도 잘하고 재치가 넘치는 사람들은 흔치 않았다. 술은 즐거울 때 마셔야한다. 그 어울림의 뒤 끝에 티격태격했던 것도 돌이켜보면 청춘의 부대낌이요, 성장의 동력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들의 옛날을 그들 모두 기억하고 있겠지만 어이하랴, 이제는 통음의 멋도 맛도 먼 이야기가 돼버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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