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23)/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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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23)/ 착각
  • 선산곡
  • 승인 2018.02.0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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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어떤 나이든 여자가 한말이 무심히 들렸다. 프랑크? 외국인 사위라도 두었나? 감각이 예사롭지 않아진다. 어떤 얼굴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더니 프랑크라고 불릴만한 외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텁텁하게 생긴 젊은이가 박스를 들고 그녀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프랑크 열어.”
그때야 그녀가 한 말을 이해했다. 자동차 트렁크를 열라는 말이었다. 나이 든 시골 할머니, 그의 입에서 나온 외래어의 둔탁한 발음을 프랑스 남자를 부르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착각은 자유라는 말이 있다. 질서나 아니면 순수한 진리에 이반되어 실제와 다르게 느껴지는 현상을 말한다. 내 착각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 메모의 습성도 없고 문서를 봐도 건성, 간단한 기억에 의존하는 버릇은 평생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나 추억에 존재한 것들이 착각이었다는 상반된 현실로 나타났을 때 그 착각이 오히려 아름답고 소중할 때가 있다.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고을로 전학을 갔다. 반나절 완행버스를 타고 가야했던 먼 길이었다. 철없던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금방 사귄 친구들 따라 어느 날 교회엘 갔다. 요즘처럼 생긴 교회가 아닌, 작은 집 마룻바닥에서 예배를 드리는 곳이었다. 엎드려 기도를 따라하다가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아멘’ 소리에도 그냥 쿨쿨 자는 나를 친구가 깨워 눈을 뜬 황당한 첫 예배였다.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산 밑에 있었던 학교 뒤편 관사가 집이었다. 텅 빈 운동장이 무섭기도 했지만 운동장과 그 앞 긴 콩밭에 교교한 달빛이 내려와 있었다.
물에 잠기기 전 마지막 한번 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강산이 몇 번 변한 뒤에 찾아간 곳이었는데도 모든 것은 그 자리에 있었다. 희한하게도 기억과 딱 들어맞은 풍경이었지만 그 길고도 멀었던 콩밭과 커다란 운동장은 생각보다 짧고 좁기만 했다. 겨우 10미터도 되지 않은 밭두렁길이 그렇게도 멀어보였을까. 기억의 잣대란 상당한 오차가 있는 게 분명하지만 그 달빛과 아득했던 길은 지울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첫 수필집에 실린 글이 하나 있다. 허리우드영화 <쟈니기타>의 주인공 운운했는데 내 기억 속 여주인공의 눈빛을 ‘아련하다’고 표현했다. 기억 속에선 그 아련이란 말이 딱 들어맞았는데 최근에 본 영화 <쟈니기타>의 여주인공의 눈빛은 아련이 절대 아니었다. 아련의 근처에나 갔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 기억력의 정도를 시험이라도 하듯 줄거리가 전혀 생소한 서부영화였다. 야들야들 애처롭고 아름다운, 어쩐지 애달픔이 담긴 눈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눈이 우락부락하고 괄괄한 성격에 권총을 쏘아대는 여전사, 조안 크로포드였으니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마도 진 시몬스가 출연한 서정적인 영화를 쟈니기타로 착각했던 것은 페기 리의 주제가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착각이란 말만 들으면 기억에만 의존한 엉터리이미지를 버젓이 활자화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려 지금 다시 해 보는 이야기다.
주위의 사람을 잘 몰라보는 것도, 외우기를 잘 못하는 것도, 편협 강한 성격 때문에 빚어지는 실수들이다. 그 실수들 중 착각의 예는 시리즈로 써도 모자랄 정도이다. 분명한 것은 그 착각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점이지만 내게 남은 아름다운 착각과 고쳐야할 착각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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