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23)/ 잡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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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23)/ 잡념
  • 선산곡
  • 승인 2018.02.13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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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잠을 깼다. 잠깐 눈을 뜨고 보는 전자벽시계, 새벽 4시가 조금 넘었다. 평소의 시간보다는 상당히 이른 시간이다. 더 자야한다. 어느 누구는 새벽에 일어나 사용하는 시간처럼 길고 알찬 것이 없다고 했다. 비교적 남들보다 통근을 많이 했던 직장생활 때문에 평생을 새벽에 일어나야만 했다. 이제 정년을 했고 시간의 여유는 많아졌지만 이전의 습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이른 시간 깨어나는 일이 전과 달리 자주 일어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간밤에 초저녁잠을 잔 탓도 있는 것 같지만 늦게 마신 커피 때문인 것도 같다. 자다 깨다를 거듭하는 초저녁잠은 오후에 걸었던 운동의 값이었지만, 커피 에스프레소는 새벽녘까지 숨어 있다가 살그머니 들이미는 각성제 같기도 하다.
이때부터 밀려오는 온갖 생각들이 문제다. 떠오르기 시작하는 잡념들을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지만 헛수고다. 거쳐 갔던 일이거나 미완의 일들이 뒤섞여 선두를 다투듯 쏟아지기 시작한다.
오디오의 FM이 소리를 내지 않는다. 스피커의 나이도 퇴출의 근처에 가있다. 한꺼번에 사 두었던 두 타스의 젤리 펜들이 전부 굳어 버렸고 손에 맞는 필기구는 없다. 오래 전에 길들여 놓은 펜촉은 어디엔가 숨어 있다. 진한 먹 잉크를 찍어 육필로 편지를 썼던 때가 너무 오래 되었다. 만년필은 팁이 굵어 잉크가 종이에 번진다. 잉크를 바꿔야 하나.
틈틈이 그려두기로 했던 커트 삽화들. 붓을 놓은 지도 오래되었다는 새삼스런 인식이 약간이나마 흐려지려는 정신을 반짝, 되돌려 놓는다. 이래선 안 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아트지를 챙겨야 한다. 아들 방 침대 밑에 아트지를 넣어놓았지. 내일은 꺼내야겠다. 이 생각도 또 잊어버릴지 모른다.
써야할 짧은 글들의 기승전결을 더듬어보기도 한다. 답답해진다. 내가 써야할 글귀들은 과연 신선한가? 써 놓은 글들은 완벽한가. 그 글들은 내 최초의 언어인가?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누군가 이전에 했던 말이다. 세상의 말들은 전부 표절’이라고 했던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름은 누구였나. 생각해 보자. 그러나 생각나지 않는다.
그 사이 절대 눈은 뜨지 않는다. 눈을 뜨면 그나마 잠들려는 내 의지는 저만큼 달아나 버릴 지도 모른다. 차라리 눈을 뜨고 영화를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잠깐 일어나서 천장 끝에 걸린 스크린만 내리면 된다. 프로젝터에 연결된 전기스위치만 누르면 벽으로 투사되는 화면이 뜬다. 만약에 그렇다면 애써 시도하는 이 노력이 아예 수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참아야 한다.
차라리 음악을 들을까? 어제 장착해 놓은 CD가 무엇이었나 생각해 본다. 자작타이틀에 어떤 뮤지션의 음악들이 실렸을까. 레오 페레 아니면 야니스 파리오스? 이웃에 방해될까봐 소리 크기도 높이지 못하는 것은 불편하다. 그래, 그것도 참자.
아까 꿈을 꾸지는 않았다. 요즘 꿈을 꾸지 않아서 다행이다. 꿈속에서 보이는 님은 신의가 없어서, 느닷없이 흥타령의 사설이 떠오른다. 중머리 박을 정확히 짚기로 한다면 조금이라도 이완시켜야할 신경이 그야말로 날을 세울 것이다. 고개를 흔든다. 박도 사설도 찢은 종이 흩트리듯이.
눈을 뜨고 다시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그 사이 몇 십 분이 흘렀다. 오오,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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