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25)/ 시간, 그 흐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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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25)/ 시간, 그 흐름에 대하여
  • 선산곡
  • 승인 2018.03.22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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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나른하다. 창문은 먼지로 얼룩져있다. 창문처럼 마음속에 얼룩져 있는 근심. 근심은 마음 한복판에 있다. 피를 말리는 시간의 흐름을 며칠 전 경험했다. 어디 물어볼 곳도, 방향도 찾지 못한 채 시계만 바라봤던 고통스럽던 순간들이었다.
딸아이의 귀국시간이 지났다. 전화는 불통이다. 하루가 그렇게 갔고 준비해 둔 환영의 대사는 무색해져 버렸다. 한순간에 집안이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차버렸다. 출입국관리소, 대사관 등에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수소문을 했지만 허탕이었다. 또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미칠 것 같다는 기분이 이런 것이었나, 아내와 나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수시로 상황파악 전화를 했던 아들, 이번에는 목소리가 침착했다.
“누나의 수첩에 제 명함이 있었나봐요.”
일본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아들을 통해 우선 상황은 파악이 됐고 서둘러 아내는 짐을 챙겼다. 회사에 휴가를 낸 아들과 함께 아내가 다음날 새벽 출국을 했다. 나 홀로 남게 된 집안에 무거운 침묵은 계속되었다. 그동안 우리를 괴롭혔던 불길한 단어들과 함께 빠르거나 더디거나, 시간의 흐름이란 정말 무섭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천천히 가슴 쓸어내리게 된 것도 시간이 흐른 덕택이다. 비로소 창밖이 보였다. 그저 멍 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공원에서 만나자는 그의 목소리는 활기에 차있다. 구원받은 기분이 되어 밖을 나선다. 며칠 새 봄빛이 은근해져 있다. 그 동안 날씨가 흐렸는지 개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는 몽롱함,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토요일, 거리엔 상춘객들이 붐비고 있다. 긴 건널목을 지나 공원 쪽으로 난 샛길을 걷는다. 청년 하나가 천천히 걷는 내 몸을 스쳐지나 앞으로 걸어간다. 같은 시간을 함께 걷는 길. 앞으로 걷는 저 걸음은 빠르지만 뒤에 걷는 내 걸음은 느리다. 청년의 뒷모습이 앞으로 가면서 멀어지고 제법 긴 인생의 길을 걸어 온 나는 뒤따라 걸으며 멀어진다. 시간은 같지만 걷는 길은 이렇게 제각각이다.
공원, 정자에 마주앉은 네 사람, 오후의 햇살이 느슨하다. 함께 마시는 술맛은 쓰지 않아 좋다. 이 먹을거리를 준비해온 사람이 고마웠지만 그 말은 감추어 둔다. 내 스스로를 위로할 수는 없어도, 이렇게 만들어진 자리의 값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누구누구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일단 제백사하고 달려오라고 한다. 짐작으로 알아차렸지만 전화를 받은 그는 곧장 달려오겠지, 오랜만에 그 얼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은 곧 빗나간다.
“지금 병원에 있답니다.”
그가 전화를 끊으며 하는 말을 애써 모른 척 해버린다. 지금 우리가족 6명 중에 4명이 외국에 있고, 아내와 아들과 딸이 병원과 그 언저리에서 고통 받고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 탓이다.
돌아와 어둔 방 불을 켠다. 시계를 본다. 속절없이 시간만 간다는 말은 이 순간 믿지 말아야한다. 공직자로 살아온 평생이라 공직자인 딸이 병가 중인, 그것도 멀리 타국에서 생사를 오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더 없이 참담하다. 그 참담함이 시간을 붙잡아 두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 또한 흐르겠지. 역시 시간을 믿어야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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