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2018년은 ‘순창’ 이름 1000년 되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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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18년은 ‘순창’ 이름 1000년 되는 해
  • 황호숙 해설사
  • 승인 2018.04.04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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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을까?

 

2018년은 전라도라는 명칭이 생긴 지 1000년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동경 126°52′∼127°18′, 북위 35°18′∼35°33′에 위치하고 면적 495.96제곱킬로미터(㎢)에 1개 읍, 10개 면, 305개 행정리(131개 법정리)가 있는 순창군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을까요?
1980년대 후반에, 섬진강 유역인 전남 곡성과 주암댐 수몰지구에서 구석기 유물이 많이 발견되면서 그 곳과 가까운 순창도 구석기 후반부터 사람이 살았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습니다.(나종우 원광대 사학과 교수)
최초의 국가였던 고조선이 세워진 시기가 청동기 시대이고, 중요한 유물이 고인돌 즉 지석묘인데 순창 전역에 퍼져 있습니다. 순창읍 신남, 인계 중산, 동계 구미ㆍ주월, 적성 내월ㆍ고원ㆍ대산, 금과 수양ㆍ동전ㆍ남계, 팔덕 구룡, 쌍치 둔전, 복흥 동산ㆍ금평, 구림 운남ㆍ금천에서 다수 발견돼 청동기시대 후기 무렵부터 순창군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짐작하기도 합니다.
삼한(마한ㆍ진한ㆍ변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였다고 합니다. 진수가 3세기 중엽에 지은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에 50여개 국명과 함께 처음 나타납니다. 마한시대의 순창은 54국 중의 하나인 소석색국(小石索國)으로 불렸는데 소석색을 잔돌새로 읽어 백제 때의 역평현, 통일신라 때의 적성현이라고 유추합니다.
강천산에 가면 구장군 폭포가 수려하게 내리꽂고 있는데요. 이 두 줄기 폭포 전설에 마한 지명이 나옵니다. 마한시대 9명의 장군이 혈맹으로 맺어졌는데 전쟁터에서 패하자 수치심에 자결하려고 했죠. 구장군 폭포 위에서 떨어져 자결하려고 하는데 바위들과 나무들이 말과 병사들로 변하며 이렇게 죽을 바에야 전쟁터에 나가서 죽는 게 더 의롭지 않겠냐고 힘을 실어 주었답니다. ‘그래 죽더라도 전쟁터에서 죽자’고 마음을 다진 아홉 장군이 전쟁터에서 크게 승리하고 이 폭포 앞에서 승리의 파티를 벌였다고 전해져 옵니다.
마한시대에는 오산(烏山) 또는 옥천(玉川)이라 불리다가 백제시대에는 도실군이 되었답니다.
순창군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기록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있습니다. 이 문헌에 의하면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토였으며 도실군과 역평현이 있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가 고려 인종 23년에 신라의 시각으로 써져 백제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지승람>에도 백제의 도실군을 신라시대에 순화군으로 고쳤다고 기록돼 있답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행정제도와 군사제도를 정비하면서 통치체제를 확립합니다. 9주 5소경 제도가 확립되면서 주 밑에 군과 현을 두었고, 군과 현은 몇 개의 촌으로 나뉘고 천민집단이 사는 향, 소, 부곡을 만듭니다. 757년(신라 경덕왕16년) 완산주가 전주로 바뀌면서 도실군은 순화군(淳化郡)으로 개칭되어 적성현(赤城縣)과 구고군(九皐郡)을 관할합니다. 역평현도 적성현으로 바뀌었다가 20년만인 혜공왕 12년에 다시 옛이름으로 환원됩니다.
고려 성종 때 강남도의 하나였던 도실(순화)군이 순주(淳州)로 개칭 승격되고 역평현도 적성현으로 개칭됩니다. 이때부터 수령이 고을에 배치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고려 현종9년(1018년)에 이르러 문물제도가 정비되고 국가적인 통치체계가 마련되면서 지방통치제도까지 확립됩니다.다. 개경과 서경 및 12계수관, 4도호부 8목이었는데 이때 순주(淳州)가 순창현으로 낮아집니다.

 

처음으로 순창이라는 이름이 등장해서 2018년 올해 천년이 되는 해입니다.

고려후기인 1314년(충숙왕1년)에 순창현이 순창군으로 승격되고 적성현도 순창군의 임내로 들어옵니다. 당시 국통(國統)인 정오선사(丁午禪師)의 고향이라 군으로 승격되었다고 합니다.
조선 태종9년에는 순창군의 임내이던 적성현과 복흥현 및 치등소, 유등촌소, 감물토소, 인좌소, 고도암소 등이 순창군의 직촌으로 병합되는 등 8개 고을이 순창군으로 통합됩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당시 순창군 호수는 317호, 인구는 1092명이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전라도 행정구역을 살펴보면 종2품의 부윤이 전주 한곳에 있었으며, 정3품 목사가 나주, 제주, 광주에 있었고, 종3품의 도호부사가 남원 등 4곳에 있었으며. 종4품 군수가 순창 등 12군데 였던 것으로 보아 순창의 위상은 상당히 상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4개 면을 관할합니다. 좌부면과 우부면이 순창면, 구암면, 무림면, 복흥면, 상치등면과 하치등면이 쌍치면으로, 인화면과 호계면이 인계면으로, 유등면, 적성면, 팔등면과 덕진면이 팔덕면으로, 풍남면과 오산면이 풍산면으로, 아동면과 임실의 영계면이 동계면으로, 금동면과 목과면이 금과면으로 합쳐지고 개칭됩니다. 1935년에 구암면과 무림면을 합쳐 구림면이 됩니다.

글 : 황호숙 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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