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28)/ 고향, 노래, 그리고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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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28)/ 고향, 노래, 그리고 눈물
  • 선산곡
  • 승인 2018.05.03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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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사월 끝자락이었다.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모래톱 위를, 예닐곱 우리들은 띄엄띄엄 떨어져 걷고 있었다. 뒤로는 적성 채계산이 누워있었고 눈앞 멀리 정자가 가물거리며 자리하고 있었다. 어은정(漁隱亭)이라고 했다. ‘꽃 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나는 혼자 나직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저 무심히, 채동선 작곡의 <망향>이었다. 오월 입대를 앞 둔 친구는 애인의 어깨를 감싸고 걸으며 뒤처져 있었고 곧 있을 이별이 아쉬웠던지 친구의 애인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문득 돌아본 내가 본 그들의 모습이었다. 사월이 그렇게 가고 있었다.
오래 전 시골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었다. 아침 자율학습, 무심코 학생이 펼쳐놓은 국어책에 실린 한 편의 시가 내 눈에 띄었다. 정지용의 <고향>이었다. 월북 또는 납북된 작가들의 문학작품이 해금된 뒤, 어느새 국어책에도 실리게 된 것을 늦게 알게 된 것이다. 자율학습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아 그 시의 수난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핵심은 이 시에 작곡가 채동선이 곡을 붙였다는 것에 있었다.
채동선이 작곡한 정지용의 시 <고향>은 작곡자의 의도에 맞추어 탄생한 곡이다. 곧 시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었으니 정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시로는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시인이 북으로 갔다는 이유였다. 이은상이 <그리워>로, 박화목이 <망향>으로 시를 새로 써 이곡에 노랫말을 붙였다. 이은상의 <그리워>는 가을을 묘사했고 박화목의 <망향>은 봄을 노래했다. 다행히 정지용의 작품이 해금되었을 때 <고향>도 다시 부를 수 있게 되었고, 시는 이렇게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다. 가곡 <고향>은 조수미의 연주가 가장 빼어나다는 - 내 긴 설명을 학생들은 침착하게 듣고 있었다.
“그 노래 선생님 아셔요?”
“알지.”
“불러주세요.”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별 망설임 없이 나는 정지용의 시로 그 노래 불렀다. 아침, 그 이른 시간에 내가 했던 노래, 성악전문의 발성도 아니었지만 나는 이미 스스로 도취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잘 정돈된 자세와 경건한 태도로 노래를 들어 주었다. 노래가 끝나자 학생들이 박수를 쳐 주었다. 약간의 울컥한 내 음성과 눈빛을 읽어낸 학생들. 수난의 시대에 헝클어진 시와 음악을 이해해준 것이 고맙기만 했다. 
그러나 정지용의 시 못지않게 잘 만들어진 박화목의 <망향>을 나는 좋아하는 편이다. 정지용의 <고향>이 다시 불리기 이전에 <망향>으로 익숙해져버린 탓이다. 테너 신일철의 연주를 으뜸으로 친다. 오케스트라의 편성조합, 연주자의 호흡, 편곡의 차이 때문인지 피아노 반주만의 연주는 속된 말로 약에 차지 않는다.
처음 중고 승용차로 통근을 하던 그해, 차 속에서 신일철의 연주를 자주 들었다. 4월 내내였다. 서쪽으로 기운 해를 안고 돌아오는 퇴근길이면 더욱 감회가 깊었다. 어떤 날은 따라 부르다 울기도 했다.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라는 구절이 결정적으로 내 심연을 자극했다고 보는 게 옳다. 그렇게 이 노래는 시로 가락으로 내 눈물을 부르기도 한다. 노래와 연관은 없지만 가끔 친구애인이 흘렸던 눈물의 값이 어떤 것이었을까 궁금할 때가 있다. 입대한 친구가 첫 휴가도 나오기 전 쪽박이 나버린 사이가 된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란 추억의 장(章) 하나 만들기 위해 흘리는 것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월이 가고 이제 오월이다. 계절은 추억을 부르고 추억은 고향을 부르고. 고향은 그리움을 부르고 그리움은 숨겨놓은 눈물을 부른다.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으며 부르는 눈물, 그 안에 그리움도 고향도 있을 것이다. 이 계절은 알 수 없는 깊은 서러움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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