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보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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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보은단
  • 양상화 이사장
  • 승인 2018.05.1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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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단(報恩緞)
양상화 단군사상선양회 이사장

조선 태조 이성계는 본관이 전주 이씨로 전주에 거주했어야 되는데 5대조가 전주에 거주 중 전라감사와 논쟁이 있어 함흥으로 이거하여 살았다. 이성계는 함흥에서 태어나 고려 말에 최영 장군 등과 장군이었다.
이성계가 아버지가 서거하여 함흥 집에 있을 때의 일이다. 무학이 나옹대사에게 풍수지리 공부하던 중 함흥에 와서, 무학이 손으로 건너편을 가리키면서 나옹대사에서 “선생님 저곳이 군왕지지 아닙니까?” 물었다. 나옹대사 “그렇지, 무슨 좌인가”하고 물으니 무학이 “무슨 좌 아닙니까?” 하니 나옹대사가 “직입수 직좌하면 직망한다”고 하였는데, 이 대화를 이성계의 부하가 듣고 급히 이성계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이야기 했다. 이 말을 들은 이성계가 “어디로 가드냐” 묻고 함흥령 쪽으로 갔다는 말에 서둘러 뒤를 쫓아가 함흥령 정상에서 나옹대사 일행을 만났다. 이성계는 말에서 내려 길바닥에 꿇고 앉아 절을 하며 “대사님! 그 군왕지지 저에게 주십시오”하니 나옹대사가 “군왕지지 모르는 일이다”라며 거절하였다. 이성계가 “심복 부하가 듣고 알려주었으니 저를 주십시오” 대사가 또 거절했다. 이에 무학이 “선생님 저렇게 진심으로 원하니 주십시오” 권하니 나옹대사가 마침내 승낙하여 이성계가 부친을 그곳에 모셨고, 그 인연으로 나옹대사와 무학과 친교가 맺어졌다. 따라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할 때 역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성계가 조선조 태조로 등극하였으나 중국 명나라에서는 전주이씨가 아니고 함흥 출신이라 한 외교문제[종계변무(宗系辨誣), 조선 개국 초부터 선조 때까지 약 200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종계(宗系)를 개록(改錄)해 줄 것을 주청한 사건]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임란(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사신 일행이 북경에 도착하였으나 명나라 외무부에서는 만나주지 않았다. 따라서 통역관으로 동행한 홍순언(洪純彦)은 할 일 없이 무모한 시간을 보내다가 무료하여 부경 술집에 갔다. 시중을 드는 여인이 나이가 어리고 귀태가 나서 물었더니 중국 남쪽 절강(浙江)에서 아버지 과거 응시를 돕고 시중하려 북경에 왔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유행병으로 돌아가셨는데 멀어서 고향으로 갈 수가 없고, 장례비가 없어서 부득이 장례비를 마련하려고 오늘 술집에 처음 나왔다는 말을 듣고 홍순언은 사비와 공금을 몽땅 털어 300금을 여인에게 주면서 빨리 가서 아버지 장례를 모시도록 하라고 하였다. 당시 300금은 현재 우리 돈으로 치면 일억 원 정도라 할 수 있다. 사신 일행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귀국했고, 홍순언은 공금횡령으로 수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선조가 다시 명나라에 갈 사신을 선정했는데 그 사신이 “중국말이 능통한 홍순언을 역관으로 주십시오”하니 선조가 홍순언을 옥에서 풀어내 역관으로 중국을 다시 가게 되었다.
사신 일행이 명나라 북경 조양문(朝陽門) 앞에 당도하니, 성문 밖에 비단이 백 필이 걸려있었다. 그 비단에는 ‘보은’이란 수를 놓아 걸려있었다. 이윽고 명나라 외무부 예부시랑(차관) 석성이 나와서 홍순언을 맞이하고, 석성의 부인이 홍순언 앞에 와서 큰절을 하였다. 홍순언이 당황하여 살펴보니 300금을 준 여인이었다. 이 여인은 절강의 명문 집 딸이었는데, 아버지 사망 시 효성심이 세상에 알려졌고, 외무부 차관 부인으로 발탁된 것이다. 홍순언은 예부시랑 석성의 부인으로부터 ‘보은’이라 수놓은 비단 백 필을 받았고, 예부시랑 석성의 도움으로 200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종계변무’를 해결하였으니 그 이상 더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선조는 남양홍씨 홍순언에게 당능군(唐陵君)이라 군호를 내렸고, 선조가 사례(謝禮)로 현 서울 을지로 2가 지역을 홍순언에게 주었으니 그곳을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사실이 외교문서 통문관지(通文館志)에 기록되었으니 홍순언의 이름은 천추에 나올 것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남자는 여자 때문에 패가망신한 일도 많으나 의협심이 강한 남자는 여인을 구하고 출세한 일도 많다. 홍순언은 의협심으로 국가의 난제를 해결하고 남양 홍씨를 국반으로 만들었으니 사나이 올바른 의협심을 후세에 까지 전한 중요한 일이다. ‘종계변무’해결 후 제일 좋은 비단을 ‘보은단’이라 하였고 홍순언의 의협심은 여러 곳에 기록되었고 모든 분의 찬사가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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