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29)/ 다시 읽는 책, 그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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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29)/ 다시 읽는 책, 그 앞에서
  • 선산곡
  • 승인 2018.05.17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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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깊은 곳에 오래토록 꽂혀 묻힌 책이 있다. 책 모습이 과거의 그늘이라는, 늙었다는 표현이 걸 맞는 것인지 모르는 오래된 책이다. 읽은 지 몇 년이 흘렀는지 가늠하기도 쉽지 않은, 5부작 대하소설이다. 작가가 발표를 시작하여 끝맺음까지 몇 십 년 걸렸으니 독자인 내가 책을 읽어낸 기간 또한 엇비슷할 것이다. 아마도 20대에 시작해서 40대에 읽기를 마쳤으니 그 기간 줄거리 기억하기도 벅찬 독서였을 것이다.
아무튼 그 대하소설을 다시 읽기로 작정을 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지만 문학의 숨결을 제대로 찾고 싶다는 뜻에서였다. 나에게 이 책은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지금 우세스런 글 몇 줄 쓰는 입장에 서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단 생각에서였다. 그 옛날은 사뭇 건성이었지만 지금은 사색을 동반한 정교한 글 읽기가 필요하다는 반성을 늘 해온 터이기도 했다.
책을 찾아 꺼내들고 보니 이른바 몰골이 말이 아니다. 1부에서부터 3부까지는 세로쓰기판형에 출판사도 각각 다르다. 양장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책은 심하게 부셔져있고 지질은 완전히 누렇게 변해있다. 원래 책을 빌려 읽는 것을 마다한 습성 때문에 읽어야할 책은 반드시 소장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기억할 수 없지만 아마도 이 책은 누군가의 손과 손으로 숱한 자리변동을 겪었거나, 이삿짐 속 아니면 이곳저곳 책장을 옮겨 다니다 받은 상처가 분명하다.
간혹 페이지에 묻어있는 어떤 자국들, 침을 묻히며 페이지를 넘겼던가, 아니면 이물질을 흘렸는지, 빛바랜 흔적들이 적지 않다. 사람들 손에 꽤 시달렸구나 하는 생각에 책을 대하는 버릇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내 딴엔 책을 소중히 다룬다고 생각해 왔고 페이지를 접는 것도 삼갔는데 남들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간지에 그 옛날의 내 필적이 있다. 후배가 선물했던 만년필로 쓴 글씨다. 무려 10여년, 그 만년필로 일기며, 편지, 온갖 글들을 써왔다. 어느 날 그 만년필이 없어졌을 때의 고통을 지금도 기억한다. 도난 맞은 만년필의 가치, 본인은 잊고 있었겠지만 그 만년필을 선물한 후배의 사랑까지 도둑맞은 것 같은 아픔이 더 컸던 그때가 언제였나. 그 마음을 아직까지도 나는 잊지 않고 있는데 그는 지금 내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지나간 과거, 지금의 자리를 생각하면 사람들은 변해야만 하는가. 마음이 씁쓸해진다.
아연당(我然堂)이라는 표현도 생경하다. 한마디로 말도 되지도 않은 당호(堂號)는 젊은 치기 때의 것이다. 말 그대로 나 절로 라는 뜻 같은데 삶의 궤적을 돌이켜보니 가당키 짝 없는 말이다. 절로라는 순응의 힘은 실은 무기력을 위장한 도피에 지나지 않았다. 도전을 두려워하고 늘 수동적으로 대처했던 일들, 그저 그렇게 살겠다는 무책임했던 젊음의 시절이었다. 값어치도 없는 알량한 포장이 그때 그쳤다는 것이 다행이지만 여전히 아그똥하게 살아보지 못한 내 인생은 후회로 남아있다.
책의 간지에 찍은 인장이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가진 수십 개의 인장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었는데 하필이면 인감으로 등록을 한 바람에 지금은 장롱 깊숙이 들어가 숨어있다. 아내는 그 인감을 절대로 내주지 않는다. 인감으로 인한 씁쓸한 기억 때문에 떼를 쓸 수도 없다. 아마도 인감등록제가 폐지되면 수중으로 돌아올지 모르는 사각 수정체(水晶體).
책갈피에 숨어 있는 누렇게 퇴색한 신문 스크랩지가 있다. 모일간지에 연재된 <문학사탐방>, 1982년 7월 24일자 신문을 오려 접어 넣어둔 모양이다. 짐작하자니 그 때 4부를 읽고 있었던 듯.
그 옛날의 뜻, 그 옛날의 글씨, 그 옛날의 치기. 세월 참 많이 흘렀다. 저 퇴색한 책을 다시 읽으며 나 또한 퇴색해졌다는 생각이 문득 가슴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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