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30)/ 추억 소묘 - 첫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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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30)/ 추억 소묘 - 첫 발
  • 선산곡
  • 승인 2018.05.3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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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버스 종점이었던 군부대 앞에서 예비군복을 입은 청년들이 버스를 가득 채웠다. 전역명령서를 들고 찾아온 향토사단에서 1주일 마지막훈련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삼 년 전 입대할 때 ‘장정들’이란 호칭으로 불리며 더러 얼굴을 익혔고 더러는 이름도 모른 채 스쳐 지난 동기들이었다. 제각각 다른 곳에서 각각 주어진 업무로 병역의 의무를 마친 사람들 모두 생기에 차 있었다. 이제 나는 재대했다. 이제 내 세상이다. 이제부터 나도 할 일이 있다. 가자! 모두가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활기 그 자체였다. 가로수 플라타너스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유리 차창 밖에서 싱그럽게 흐르고 있었다. 충만한 청춘이었다. 그 충만의 패기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기도취도 분명 있었다. 유년의 개울가에서 군대라는 청춘의 강을 건넜다는 것은 인생의 한 장(章)을 넘겼다는 자부감이기도 했다.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그날이 내 생일이었다. 묘한 출발점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1974년 5월 11일, 아카시 꽃이 흐드러지게 핀, 환장하게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적성강 모래사장과 포플러 나무 숲에서 지치게 놀다 돌아온 날 저녁이었다.
“넌 제대했다면서 인사도 오지 않느냐?”
모교 교장인 중학교 때 은사님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으면서 달력을 봤더니 날짜가 어느새 5월의 끝자락에 있었다. 찾아뵙기를 차일피일 미룬 것도 사실이었지만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난 줄 미처 모르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계획조차 머릿속에 정돈되지 않았던 환상 속을 헤매다가 은사님의 질책에 퍼뜩 깨달은 내 자리였다.
“내일 학교에 좀 나오게. 나 좀 도와줘야할 일이 있어.”
긴 말씀 하지 않고 전화를 끊으셨다. 도와드릴 일이 무엇인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현역시절, 휴가 중에는 찾아뵌 적 있었지만 정작 제대해서 늑장 부린 것이 죄스러웠던 것이 우선이었다. 구두도 없고 제대로 갖추어 입을 옷도 없고 되는대로 다음날 모교를 찾아갔다. 교문 앞 화단에서 고교 때 은사님이 화초를 정리하고 계셨다.
“알고 있네, 어서 오소.”
무얼 알고 계신단 뜻인지는 몰라도 이래저래 두 분 은사님 뵙기가 민망했던 아침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출장 중이셨고 대신 맞아준 교감선생님이 내게 출석부를 쥐어주었다.
“말씀 못 들으셨소? 하루가 급하게 강사선생이 필요했는데.”
어안이 벙벙했지만 뜻밖이어도 너무나 뜻밖인, 의도하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간밤에 말씀이라도 해 주셨더라면 짧은 셔츠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이렇게 터덜터덜 학교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엄연한 것은 지금 당장 교실에 가서 수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출석부를 들고 연구부장의 안내를 받아 교실에 들어갔다. 단 하루 만의 반전이었다. 교실이 넓어보였다. 어제는 놈팡이, 오늘은 선생님, 아니 학교에 올라올 때와 내려갈 때의 변환이라고 해야 옳은 말일지 모른다. 전역한 뒤 딱 20일 후였다. 느닷없고 준비되지 않았던 내게 닥친 일이었다. 행운이었을까 아니면 고통의 시작이었을까. 내 청춘 반쪽의 시작은 덜 익은 풋사과 바로 그 자체였다. 첫 직장, 첫 출근, 첫 만남들. 얼결에 맞은 제2 인생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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