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31)/ 추억 소묘 -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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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31)/ 추억 소묘 - 여행
  • 선산곡
  • 승인 2018.06.15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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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이 되었다. 녹음이 짙어가는 유월의 들녘엔 보릿가실이 한창이었다. 농번기 방학을 이용해서 생전 처음 가보는 직원 단체여행의 목적지는 한려수도 근역이었다.
여수에서 1박이었다. 아침, 날이 밝았지만 간밤 깊도록 이어진 술자리 때문에 일행들 대부분이 쉽게 일어 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조금 이른 시간에 깨어 밖을 나오니 단 둘이었던 여선생들이 숙소 앞에 나와 있었다. 호위도 해줄 겸 여수항 산책을 가자고 했다. 물이 든 때였는지 바닷물이 부두에 찰랑거리는 항구 주변엔 새벽 장사를 나온 아주머니들이 즐비하게 좌판을 벌려놓고 있었다. 그 중에서 오디를 파는 아주머니와 흥정을 마친 우리들은 그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귀아귀 오디를 먹었다. 손도 입도 새까맣게 변한 우리들이 여관에 돌아오자 나이 드신 선생님이 쯧쯧, 혀를 차기도 했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세상이 즐겁다는 생각을 했던 유일한 한때였다. 전혀 예기치도 않았다가 한 집단의 일원이 되어 소속감이 생겼다는 것은 미래의 불안을 우선 잊을 수 있기 충분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이 여행을 따라나서기 위해서조차 작은 누님의 청바지와 검정 선글라스를 빌려야만했다. 후배에게 빌린 기타까지 들고 나선 나는 일행 중에서도 나이가 제일 어린 사람이었다.
한려수도 뱃길 관광을 마치고 우리나라 최초의 현수교라는 남해대교를 구경하는 것을 끝으로 여행은 파장이 되었다. 전세버스가 남해를 출발하기 전 이탈의 모의가 시작되었다. 이참에 우리끼리 또 다른 여행 스케줄을 잡자고 누군가 제안을 했고 뜻있는 젊은 교사들이 거기에 동조한 것이다. 여교사 둘, 남교사 여섯이 남해에서 구례 화엄사로 가는 직행버스를 탔다. 그 중에 금발 머리에 눈이 파란 평화봉사단 미국인 교사 로버트 메쉬번도 끼어 있었다.
6월의 산사,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화엄사는 온통 푸른 녹음 속에 파묻혀 있었다. 산사 입구의 계단이 높은 여관에서 일행이 여장을 풀었다. 하늘은 흐려있더니 아니나 다를까, 초저녁이 되자 실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관 주변을 드리운 나무 잎사귀들이 촉촉이 젖어 야릇한 안도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밤 내리자 두 칸 장방에서 파티가 시작되었다. 네 짝 미닫이문을 활짝 열어둔 채였다. 우리들의 잔잔한 흥취를 구경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관집 일보는 사람들과, 투숙객 몇몇이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처럼 마루에 걸터앉아 우리들 술 마시며 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진지하고 순수한 젊음이 구경거리가 되었던 밤이었다. 상을 두드리지도 않았고 서서 뛰는 사람도 없었지만 흥취는 진득하게 녹아있었다. 기타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들은 화음을 이루었고 박자 또한 어긋나지 않았다.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아르페지오 기법으로 뜯는 내 기타반주는 분위기에 그다지 어긋나지 않았다.
마루 한쪽 구석에는 큰 물통에 맥주가 가득 담겨 있었다. 냉장고도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긴 노래를 마친 우리들이 잠시 쉬는 동안 마루에 앉아있던 중년의 사내가 노래 한곡을 불러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사월과 오월의 <옛사랑>. 소월 시 일부분을 가사로 차용한 노래였다. 한잔 술 마시는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머뭇거림 없이 내가 기타를 다시 들었다.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어스레한 등불의 밤이
방안에서 마루를 지나 좁은 마당을 건넌 불빛이 담장 앞 화단에 머물러 있었다. 그 사이 비는 그쳐 있었다. 촉촉한 감흥, 촉촉한 젊음, 밤이 천천히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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