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32)/ 73년 유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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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32)/ 73년 유월 1
  • 선산곡
  • 승인 2018.06.27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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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

 

주말, 외출을 했다. 이씨 성을 가진 세 사람 사이에 쌀의 뉘처럼 내가 끼어있었다. 군인극장에 가는 것을 생략하고, 탁구장으로 가서 술내기를 하자 했다. 상병 하나 병장 셋, 같은 행정과에 근무하는 동기들이었다.
“할 말이 있어. 꼭 전화 좀 해 줘.”
며칠 전 1주일 청원 휴가를 떠난 그가 신신당부, 내게 남긴 말이 생각났다. 토요일 외출을 하면 서울 자기 집에 전화해 달라는 그의 말을 나는 무심히 흘려들었다. 서무병인 내가 그의 휴가증 직인을 정교하게 찍고 있을 때였다. 전화를 하면 별 중요하지도 않는 시답잖은 말만 나누다가 통화는 끝날 것이다. 무심히 흘려듣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지만 그의 청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몇 번 경험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탁구장에서 잠시 혼자 빠져나와 근처의 다방에 들어갔다. 「심지(心池)」라는 뮤직다방이었다. 교환원을 통해 시외전화를 할 수 있는 곳은 우체국 아니면 다방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통화는 또 싱겁게 끝났다. 그럴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래야만 했던 과정에 나는 약이 올라 있었다. 뮤직 룸에 레코드 재킷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DJ의 모습이 보였다. 커피를 주문해놓고 메모장을 보냈다. ‘온통 우울, 외출 역효과’ 그리고 신청곡을 썼다. 아다모의 <눈이 내리네>, 그리고 실비 바르땅의 <라 마리자> 두 곡이었다. 톱톱한 군복 안으로 뜨거운 열기가 차기 시작하는 계절에 <눈이 내리네>를 신청했던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아직 선풍기도 없는 다방구석에 앉아 눈송이가 날리는 겨울을 상상하는 실없는 반전은 스스로에게 부리는 오기나 다름없었다. 방금 전의 통화가 그 원인이었다.
DJ는 능숙하게 레코드를 찾더니 아다모의 <눈이 내리네>를 먼저 올려주었다. 다방 안에는 나 혼자였다. 입대 전 눈 내리는 거리를 쏘다니며 흥얼거렸던 추억이 떠올랐다.
“우울하신 병장 아저씨, 힘내십시오.”
DJ의 멘트가 <라 마리자>의 서주에 얹혀있었다. 박스 안에서 계급장이 보였는지 커피 잔을 든 내게 보낸, DJ답게 무겁고 낮은 음성이었다.
현충일 휴무는 ‘경건함’에 포장되어 평소 휴일이면 쉽게 묵인되던 ‘한잔’의 여유도 배격시켰다. 주번완장을 차고 퀀셋막사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작은 창문에 푸른 하늘이 보였다. 어제 귀대한 그가 모습을 나타냈지만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뭐가 불만이었는지 씩씩거리다가 나가버리는 그의 모습을 냉정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혼자 생각,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문득 담배가 빨리지 않음을 알았다. 다시 라이터를 켜고 불을 붙였다. 담뱃불은 쉽게 붙지 않고 헛바람이 빨렸다. 그제야 바라본 담배개피에 구멍이 숭숭 난 것을 알 수 있었다. 방금 그가 송곳으로 무언가를 콩콩 찍어대던 모습이 떠올랐다. 낡아빠진 책상모서리를 찍는 줄 알았는데 책상 위에 놓인 내 담뱃갑을 찍어댄 모양이었다. 담뱃갑은 통째로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그의 심술을 확인한 것이다.
군인끼리, 남자끼리, 우정도 아니고, 전우애도 아니고, 선임의 권위도 아니고, 후임의 반항도, 불신도 아니었다. 대화는 별로 나누지 않으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으르렁거리는 관계, 그냥 관계일 뿐이었다. 우리가 늘 그렇게 으르렁댔던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무튼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분명한 것은 그가 얼마 후면 제대하여 떠난다는 것이었고 나는 아직 1년이라는 짱짱한 기간을 이 퀀셋막사 안에서 타이프 키를 두들겨야한다는 사실이었다. 73년 유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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