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ㆍ3바로알기①/ 해방과 함께 찾아온 남북 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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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ㆍ3바로알기①/ 해방과 함께 찾아온 남북 분단
  • 한상희 연구사
  • 승인 2018.08.22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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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ㆍ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제주 4ㆍ3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군이 한반도의 38도선 이남 지역을 점령해 통치했던 미군정기에 발발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어 총 7년여에 걸쳐 극심한 인명 피해를 낳은 비극적인 사건이다.
본 연재 글은 분단과 냉전 과정에서 탄압과 항쟁, 통일 운동, 대수난의 국면이 전개되었던 4ㆍ3 사건과 4ㆍ3 이후 70년의 이야기를 평화와 인권, 정의와 통일의 관점에서 순창 군민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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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의 기쁨을 맞이했다. 그런데 일본이 물러난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 소련 등 연합군에게 패배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패배하자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 북쪽에는 소련군이 들어오고, 남쪽 지역은  미군이 진주하게 되면서 남북이 분단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당시 미군은 “본관 휘하의 전승군은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함”이라는 맥아더 포고문 1호를 발표하며 우리 땅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만 3년간 직접 통치했다. 이때를 미군정 시기라고 부른다.
한반도 남쪽과 북쪽을 각각 점령한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세력 확장에만 관심이 있을 뿐 우리 민족이 갈망하는 국가 건설에는 관심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민족이 열망했던 통일 민주 국가의 수립은 멀어져만 가고 분단은 우리 민족의 현실로 다가서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전국적으로 인민위원회(해방 직후 여운형이 주도해 결성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됨)가 조직돼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자치기관인 인민위원회는 일본이 패망한 직후부터 미군이 진주하기 전까지의 공백기에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기도 했다. 물론 제주도에도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대부분 독립운동가 중심으로 구성된 인민위원회는 악질적인 친일세력을 제외한 모든 세력과 결합하여 해방 직후의 제주사회를 이끌면서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군정도 인민위원회와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미군정과 인민위원회의 대립이 커져 갔다.
해방이 되자 제주도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등지에서 노동을 하며 경제활동을 하던 6만여 명이 귀향했는데, 제주도에는 이들의 일자리가 없었다. 그 결과 경제가 어려워졌고, 미군정이 일본과의 교역을 막아 생활필수품이 매우 부족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미군정 관리들은 밀수품 단속을 구실로 귀향민들의 물품을 빼앗고 장사꾼과 결탁하여 부정행위를 일삼았다.
게다가 1946년에는 큰 흉년이 들어 식량난이 발생했고, 그 무렵 무서운 전염병인 콜레라가 번져 400명 가까이 사망하는 등 제주사회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미군정은 식량 정책이 실패하자 곡식을 강제로 수집하였는데 이에 대해 제주도민들은 크게 분노하였다.
한편 미군정은 일제 관리와 경찰을 다시 등용했다. 경찰 간부의 대부분이 일제강점기 때의 경찰로 채워졌다. 일제 경찰이 미군정 경찰로 옷만 갈아입은 것이다. 국방경비대 간부들도 대부분 친일파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체제 속에서 전개된 미군정의 반공정책에 편승함으로써 자신들의 친일 행적을 지웠고, 미군정이라는 거대한 그늘 아래에서 다시 권력을 잡았다.
또한 미군정 시기에는 많은 반공단체들이 조직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단체가 서북청년회였다. 서북청년회는 ‘서청’이라 불리며 4·3의 강경진압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4·3 발발 이전부터 제주도민의 감정을 자극하여 4·3 발발의 한 요인이 되었다.

글 한상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학교교육과 교육연구사, <청소년을 위한 제주사> 공저(제주사랑역사교사모임 2008), <청소년 제주 4.3의 길을 가다> 공저(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2017), 4ㆍ3 70주년 전국 블로그기자단 제주 4ㆍ3 기행 안내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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