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36)/ 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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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36)/ 그 이름
  • 선산곡
  • 승인 2018.08.3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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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한 며칠 뒤 온 나라를 충격에 빠트린 사건이 벌어졌다. ‘김신조 1·21’ 사태였다. 청년들의 길은 뒤틀리며 흐르고 있었다. 현역군인들의 복무는 어느 순간 연장되었고 이후 수십 년, 대물림으로까지 남게 된 향토예비군이 창설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어느 누구 드러내놓고 이견을 제시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마치 당연한 듯 나라의 운명에 순응하는 불안한 청춘이 시작되고 있음을 깨닫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들의 청춘, 우리들의 사회 첫발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일찍 사업을 시작한 친구의 가게에서 별로 멀지 않은 거리에 주막집 간판이 <중앙옥>이었다. 황토 흙벽이 부슬거리는, 길쭉하게 높아 보인 허름한 건물이었다. 스무 살 이짝저짝의 앳된 총각들이 그 집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고운 얼굴에 빨간 쪽댕기를 두르고 비녀를 꽂은 주인아주머니의 음식솜씨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언사나 자태가 짱짱하고 스스럼없어 웬만한 사람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금방 알게 되었다. 우리들 몇몇이 누님이라고 불렀고 그 누님이 나를 부르는 별명은 ‘이삔이’였다. 그때의 만남이 평생인연이 되어 단골손님을 넘어선 식구처럼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중앙옥이 이사를 가게 되었다. 순창병원 앞 어떤 선배의 집 가게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상호가 뜬금없이 <대전집>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친정이 대전이유?”
“아녀.”
“그럼 왜 대전?”
“우리나라 가장 가운데 있는 도시 아닌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서울 할 것 없이 올라가고 내려올 때마다 거쳐야 허는 곳!”
오가는 사람이 들러 가는 집이라는 뜻에서 그 상호를 정했다는 말을 듣고 자기심지를 세울 줄 아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이 든 주객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젊은 우리 또래들이 그 집을 자주 찾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노소가 따로 없는 그의 포용력 때문이었겠지만 우리말고도 그를 누님 아니면 이모, 또는 어머니라고 부르는 젊은이들이 많은 편이었다.
아버지 초상 때 장사를 접고 상중 내내 우리 집에서 상복을 입었다. 재미있는 말이었지만 형들은 ‘우리 막내 때문에 와주지 않았느냐’는 말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둘째형님과 초등학교 동창이었고 아버지께 배웠다는 인연도 있었지만 나 때문에 한 식구처럼 상복을 입은 것은 아마도 인간의 정리(情理)를 넘어선 의리(義理) 때문은 아니었을까.
“뭐드로 와.”
뭣 하러 와, 갑작스런 발병에 문병도 허망하여 멍해진 나를 보고 하던 말씀이었다. 아들의 부축으로 온 몸을 뒤척이는 고통을 참으며 힘겨워하는 모습, 정말 그렇게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그의 발병이었다. 정말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되돌아 나왔을 때의 비통함이 아직도 내게는 어제 일처럼 선명하기만 하다.
어느 날 쪽을 버리고 머리를 싹둑 잘라버린 모습에 놀란 내게 했던 말.
“그 손길이 닿은 이 머릿결이 싫어. 돌이켜지지도 않고 돌이킬 필요도 없는 옛날. 옛날은 차라리 치욕이여! 그래서 잘랐지!”
그 말을 지금도 지울 수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옛날의 치욕은 잘라버리는 것. 누가 그 속마음을 알 수 있었을까. 빈자리가 허망하여 뜬 구름 같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가신 지 어언 30여년 세월이 흘렀다. 지금 몬당 어디에 잠들어 꽃 한 송이 놓아주길 기다리고 있을까. 큰 벗님네. 그 이름 옥성 김옥례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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