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37)/ 새벽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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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37)/ 새벽 단상
  • 선산곡
  • 승인 2018.09.13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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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눈을 뜬다. 빗소리, 가을 장맛비. 요 며칠 비는 오다 갰다 다시 오기를 반복하는 건들장마다. 방 창문을 조금 열어 놓은 탓이었는지 제법 크게 들리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쏴하는 소리, 가을 비 치고는 제법 많이 오는가보다. 가을은 비와 어울리기도 하지만 추적추적 젖어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기분이 짙게 가라앉는 것도 요즘 스스로 느끼는 변화 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펼친 비에 대한 예찬은 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나 자신도 심신을 함께 적시듯 비로 인한 습도를 즐겼던 때가 많았다. 우산 없이 비 철철 맞아본 것은 10대 때의 일이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한 커피 한 잔 내려 빗물 흐르는 유리 창가에 앉는 것도 즐거운 일 중 하나였다.
그런 비가 이제는 한밤중에 왔다가 아침이면 그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온종일 비가 내리면 뭔가가 불편했고 그것이 우울함이라는 것을 최근에 깨닫게 된 것이다. 통증이 깊은 독감처럼, 아파서 우울해지는 것이 가을비 때문이라면 그 비가 이젠 싫다. 그저 재치기 몇 번에 털어낼 수 있는 감기 정도면 좋겠다. 아침에 활짝 개지는 않겠지만 종일 내리지 않았으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잦은 비에 햇살 꼿꼿한 가을풍경을 보고 싶은 탓도 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일어서서 창문을 닫는다. 한순간에 빗소리가 멀어지고 방안은 고요해진다. 오디오 전원의 스위치를 넣는다. 간밤에 CD 트레이에 미리 장착해 놓은 음반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잠깐 잊었다. 조용하게, 방안에서 혼자만이 들을 수 있도록 음량을 낮추어 놓고 다시 자리에 눕는다. 다시 잠들 수 있으려면 흐르는 음악에 몰입하지 말아야 한다. 음악이 흐르더라도 절로 다시 잠들 수 있다면 좋다. 새벽 여윈잠이 아니길 바라면서 듣는 음악은 무겁지 않아야 한다. 오디오에서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내가 사랑에 빠질 때」, 크리스 보티의 트럼펫 연주다. 솔직히 도리스 데이의 원곡보다, 낫킹콜보다 이 트럼페터의 연주가 나는 가장 좋다.
악기의 호불호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트럼펫 소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으로 흐느끼듯 흐르는 트럼펫의 음색.
니니 루소의 멋진 트럼펫 연주곡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번안솜씨가 좋은지 원래 「침묵」이라는 제목을 「밤하늘의 트럼펫」으로 멋지게 바꾸어 놓았다. 그래선지 이 곡을 밝은 대낮에 듣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웬만한 트럼펫 연주곡들을 거의 밤에 듣기를 즐겨하는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길」이라는 이탈리아 영화가 있다. 페데리코 페리니 감독. 젬파노(안소니 퀸)의 1인 서커스를 따라다니며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는 서툰 트럼펫을 분다. 그 트럼펫의 음률을 기억하고 있던 젬파노, 오랜 세월 뒤 자기가 버렸던 젤소미나의 죽음을 우연히 알게 된다. 때늦게 깨달은 사랑과 후회를 상징하는 파도가 그런 모습이었나, 젬파노는 밤 바닷가 모래사장에 쓰러져 흐느낀다. 잊을 수 없는 마지막 명장면이다. 영화음악의 대가 니노 로타가 작곡한 「길」은 곧 트럼펫 음색이 테마다.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장 클로드 볼레리, 아투로 산도발의 연주들, 파초 플로레스, 모리스 앙드레, 입으로 저렇게 표현할 수 있는가를 의심케 하는 세르게이 나카리아코프 등 유명 트럼페터들이 이름들이 내 가슴을 흔들고 있다.
“왜 안 나와?”
약속장소에서 주차시켜놓고 그대로 차안에 머물러 있는 내게 때마침 마중 나온 친구가 소리를 질렀다. 원래 관현악연주지만 트럼펫으로 편곡한 지아조토의 「아다지오」를 나는 듣고 있었다. 요코 하리안네의 트럼펫연주가 끝날 때까지 나는 그대로 차 안에 앉아있었다. 그게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가만히 귀 기울이니 낮게 빗소리가 들린다. 저 빗소리 결코 소음은 아니지. 가을장마는 계속될 모양이다. 크리스 보티의 연주는 진작 흘러갔고 하버 알버스타인의 삼투압 같은 음률이 어두운 새벽 정적을 알맞게 적신다. 잠 더 이루기는 이제 틀렸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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