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ㆍ3 바로알기③/ 제주도민 저항과 가혹한 학살, 4.3 이후 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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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ㆍ3 바로알기③/ 제주도민 저항과 가혹한 학살, 4.3 이후 70년
  • 한상희 연구사
  • 승인 2018.10.0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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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봉기가 발생하자 제주도 주둔 경비대 제9연대장인 김익렬 중령은 이 사건의 원인이 제주도민에 대한 경찰과 서청의 무리한 행동 때문이라고 이해하면서 무조건적인 강경진압보다는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4월 28일,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은 치열한 논쟁 끝에 극적인 타결을 이루어 평화협상이 체결되어 전투를 72시간 이내에 전투를 중단하기로 합의하였다. 만약 이 합의가 그대로 지켜지기만 했어도 이후 벌어질 참혹한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5월 1일 제주시 오라리 연미마을에 무장대처럼 꾸민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단체 청년들이 몰려와 불을 지르고 난동을 피우면서 4ㆍ28 평화협상이 깨지게 된다. 1948년 10월 17일, 신임 제9연대장 송요찬(宋堯讚) 소령은 포고문을 통해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지역은 무장대의 활동 지역이라며 중산간지역의 통행을 금지하였다. 또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장대로 간주해 총살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점은 사람이 살지 않는 밀림지대가 아니라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위치한 곳이다. 중산간 마을에서 주민들이 보이면 무조건 총살하겠다는 무지막지한 발표를 한 것이다.
한 달 후인 11월 17일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 무렵부터 중산간 마을은 군인들에 의해 모두 불타고 주민들은 해안 마을로 강제 이주 당한다. 무서워 마을을 떠나지 못한 채 방황하던 주민들은 토벌대에게 발견되자마자 무차별 학살당했다. 이른바 ‘초토화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노인이나 여성 심지어 어린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물며 전쟁 지역도 아닌 곳에서 이처럼 무자비한 학살이 한동안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중산간 마을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희생자의 90% 정도가 군·경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는데, 이들 대부분이 초토화작전 기간에 죽임을 당했다. 아기부터 노인, 여성들의 희생이 전체 희생자의 30%를 차지한다. 그런데 1950년 6·25전쟁이 벌어지자 또다시 학살극이 벌어졌다.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이다. 예비검속은 범죄 가능성이 있다는 자의적인 판단만으로 아직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을 체포해 구금하는 것을 말한다. 이승만 정부는 6ㆍ25 전쟁 발발 직후 불법적인 예비검속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감금하는데 그치지 않고 학살했다. 전국적으로 벌어진 ‘보도연맹원 학살’은 예비검속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제주에서 예비 검속된 사람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수장되거나, 정뜨르 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서, 그리고 섯알오름 탄약고 터 등에서 집단 학살되었다.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던 많은 사람들은 처형되어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가 해제됨으로써 7년 7개월의 4ㆍ3사건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도 오랜 기간 4·3사건은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단어였다. 군사정권은 은폐된 4ㆍ3의 진상을 밝히려는 사람을 탄압하고 감옥에 가뒀다. 그래서 누구도 4ㆍ3을 입에 담지 못했다.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는 소설가 현기영이 조천읍 북촌리 학살사건을 다룬 ‘순이 삼촌’이라는 작품을 쓰면서부터이다. 이후 1987년 민주화 항쟁과 더불어 4ㆍ3 진상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 그것이 결실을 맺어 2000년에는 4ㆍ3특별법이 제정·공포되었고, 2003년에는 정부의 공식 보고서인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보고서가 확정된 지 보름 만에 제주도에 직접 와서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며 국가를 대표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또한 2014년 박근혜 정부는 ‘4ㆍ3 희생자 추념일’을 법정기념일로 정했다.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서로 등을 돌리고 반목해왔던 4ㆍ3 유족과 전직 경찰관 단체(제주경우회)도 2013년 ‘화해와 상생’이란 이름 아래 손을 잡았다. 2014년에는 4ㆍ3희생자 추모식에서 합동 참배를 했고, 전국체육대회 개막식 때는 유족회장과 경우회장이 나란히 성화를 봉송하며 입장하기도 했다. 4·3사건을 중심에 놓고 서로 반대편에 섰던 단체가 화해의 악수를 한 것이다.
이제 4ㆍ3사건은 제주도민만이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지역사가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과 소련에 의한 남북 분단과 국제적인 냉전, 그리고 미군정과 정부수립 과정의 과도기에 발생한 불행했던 사건으로 전 국민이 인식하는 역사가 되었다. 
제주도민들은 용서와 화해로써 지난날의 아픔을 치유하면서 밝은 미래를 향해 나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한 것은 이처럼 어둠을 빛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제주도민의 지혜를 모든 이들에게 알려주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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