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39)/ 전당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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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39)/ 전당포
  • 선산곡
  • 승인 2018.10.18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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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특별 휴가였다. 일과가 끝난 뒤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뜻밖에 받은 휴가명령이었다. 불쑥 생각난 듯 너 좀 쉬었다 와! 행정과장이 퇴근준비를 하면서 하는 말이었다.
부랴부랴 휴가증을 만들어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을 때는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함께 출발했던 후임 장일병이야 집이 서울이었지만 나로서는 고향 쪽으로 가는 고속버스도 끊긴데다 통금까지 제한을 받아야 하는 늦은 겨울밤이었다.
사정을 안 장일병이 자기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길 권했다. 마음이야 며칠 안 되는 특별휴가라 시간이 아쉬웠지만 별 도리 없이 그의 권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떠나오느라 내 호주머니는 사실, 차비조차 부족한 상태였다.
서울 도시의 한복판, 얼마 전 큰 불로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연각 호텔의 시커먼 몰골이 올려다 보이는 근방에 장일병의 집이 있었다. 예기치 않았던 손님에게 차가운 대처라는 말이 더 어울려 보이는 장일병 가족들이었다. 전형적인 서울말 억양이 그 분위기를 증명해 보이는 듯하여 나는 거의 말문을 닫고 있었다. 묻는 말도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결코 편안하지 않은 하룻밤이었다.
아침에 몇 푼의 여비를 꾸어달라는 내 말을 장일병이 못 들은 체했다. 무색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던 것은 자존심이 아닌, 불편함을 어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와 헤어져 터덜터덜 걷다가 들어간 곳이 전당포였다. 손목에 채워진, 별로 값나가지 않은 시계를 풀었다. 버스표와 아버지께 드릴 소주 한 병 살 정도의 돈이 철창 안에서 나왔다. 전당포 주인에게 노출해야했던 내 군복차림과 얼굴이 그 정도 값에 충족된 모양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살해대상으로 삼았던 사람이 전당포 노파였다. 노파였던 처녀였던 왜 하필 전당포 주인이었을까. 소설에서 전개되는 도덕적 초인주의도, 양심의 가책도, 내가 처한 이 궁핍과는 이야기가 다른 것이었다. 수치스러움과 반비례하는 은밀한 증오였을까, 돈을 내주는 늙은 영감의 얼굴이 어쩐지 쳐다보기 싫었다.
귀대하던 날 전당포에서 시계를 다시 찾았다. 물건을 맡기고 빌린 돈을 갚아야 한다는 것은 책임 있는 일이기도 했지만 내게는 전당포 한 구석에 웅크린 자존심을 찾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남루를 벗는 마음으로 문을 나선 뒤 몇 십 년이 흘렀지만 다시는 전당포를 찾을 기회는 없었다.
신용카드가 생겨 전당포가 거의 사라져 간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 강남엔 가방이니 골프채니, 명품만 받는 전당포가 있다고 했다. 차표 한 장과 소주 한 병의 값이었던 그 옛날 낡은 내 손목시계를 생각해보니 세상 달라져도 참 많이 달라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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