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40)/ 주흘산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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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40)/ 주흘산 아래에서
  • 선산곡
  • 승인 2018.11.0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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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의 여행을 문경으로 선택했다. 단풍이 적기라는 방송을 보기도 했지만 가을에 꼭 찾고 싶었던 고장이기도 했다. 생전 처음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달리며 인터넷으로 예약한 숙소를 찾아가는 길이 조금은 설레기도 했다.
이른 새벽에 출발했지만 오던 길에 해찰 관광을 한 탓에 문경을 도착한 때는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을 때였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나선 길, 황혼이 되기 전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귀향을 서두르는 듯했다.
주흘산, 문경새재가 있는 산 이름이기도 하다. 산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은 전과 달리 인공의 길을 따랐을 것이다. 새로 조성한 둘레길은 물줄기를 가운데 두고 양 옆에 길게 뻗어있었다. 벌써 삭정이처럼 건조해진 억새들이 하얀 무리를 져 내를 완전 점령하고 있었다. 새재는 곧 억새가 많은 재라는 뜻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령(鳥嶺)이라는 명칭도 있어 새(鳥)재 또한 맞는 말이겠으나 그렇게 불리는 뜻 또한 어려가지가 더 있는 모양이다. 아무려나 어떤 뜻으로 불러도 새재는 새재다.
영화촬영을 하기 위한 세트장이 눈에 들어온다. 광화문이며 한옥마을이 속 빈 강정처럼 서 있다. 겉치장만 해 놓은 두텁지 않은 가짜건물들이다. 그 가짜 초가의 뒤뜰 감나무에 붉은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얼핏 어울려 보이나 자연미와 인공미라는 풍경의 진위(眞僞)가 뚜렷하다.
물가에 서서 물소리를 듣는다. 내가 주흘산을 찾은 것은 둘도 아니고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것은 물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실린 권응인(權應仁)의 『송계만록(松溪漫錄)』에 실린 글이 있다.
안동에 청렴한 선비 이효칙(李孝則)이 어무적(魚無迹)과 우연히 문경새재에서 만났다. 서출이었지만 훌륭한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진 어무적이 행색이 초라한 이효칙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좋은 가을 풍경을 두고 시 한줄 써지지 않는 어무적, 이효칙 먼저 한 수 지었다. 봉놋방 한쪽에 지필묵이라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결은 대결이었던 모양이다.

 

秋風黃葉落紛紛
추풍에 노란 잎은 우수수 떨어지는데
主屹山高半沒雲
주흘산 높이 솟아 반은 구름 속에 묻혔구나
二十四橋嗚咽水
이십사교 흐느끼는 물소리를
一年三度客中聞
한 해 세 번 나그네 길에서 듣네

어무적이 그 자리에서 붓을 놓고 말았다. 붓을 놓았다는 ‘각필(閣筆)’은 더 이상 이효칙의 시와 견주지 않았다는 상황설명이 분명하다. 시인이 시인을 알아본 것이다. 아무튼 이효칙은 이 시 한 수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24교는 어디일까. 문경새재를 목적지로 정한 뒤 온갖 자료를 다 뒤져도 그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중국 양주의 이십사교처럼 상징의 다리라 생각해 두고, 나무와 나무 홍엽지는 물가에 서서 나도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새재를 오며 가며 입신하지 못한 낙심을 물소리로 달랬을 가난한 옛 선비의 시 한 줄. 깊은 가을에 듣는 물소리야 예와 지금 무엇이 다르랴. 그 정취 하나만 끌어안았으니 이곳을 찾은 목적은 이룬 셈이었다. 주흘산에 천천히 석양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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