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의병장 임병찬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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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의병장 임병찬에 대한 단상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8.11.0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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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 침략이 본격화 되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유림들은 신분질서 유지 등 전근대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시대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한계를 갖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 되던 을미사변 이후 일부 유림들은 항일의병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들의 의병활동은 국권피탈(1910년) 이후 동학농민군 출신과 함께 후일 항일무장독립운동 세력의 근간이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여 호남 최초로 을사의병을 주도한 이들은 최익현과 그의 제자 임병찬이었다. 임병찬은 전라북도 옥구(군산) 출신으로 39세(1889년)에 낙안군수를 역임했다.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외교권이 박탈되자 호남으로 내려온 최익현을 스승으로 받들고 이듬해인 1906년 태인(현재 정읍시 칠보면)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8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빠른 속도로 정읍을 격파하고 6월 7일 순창읍에 들어서 객사에 지휘본부를 설치했다. 하지만 일제가 고종을 협박하여 의병해산 칙서를 내리고, 6월 20일 순창에 나타난 군인이 일본군이 아니고,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 군사라는 것 때문에 최익현은 어찌 동족끼리 싸울 수 있겠냐며 해산명령을 내린다. 결국 구림 화암리에서 임병찬을 비롯한 12명만이 최종적으로 남아 최익현과 함께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된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순창 12 의사'라 불렀다.
붙잡힌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로 유배됐고, 그해 최익현은 일본 땅에서 숨을 거두지만, 임병찬은 석방되어 고국에 돌아온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 다시 거의(擧義)할 것을 꾀하던 중, 1914년 고종의 ‘독립의군부사령총장’이라는 밀명을 받고 독립의군부의 전국적인 조직을 하고 활동을 전개하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거문도에서 구금생활을 하던 중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그런데 최익현과 함께 을사의병의 주역이었던 의병장 임병찬에 대한 평가는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동학농민혁명의 3대 지도자 중 한 명인 김개남을 밀고하여 죽게 한 것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 임병찬은 그 공으로 조정에서 내린 임실군수 벼슬도 거부했고 관찰사가 보낸 쌀 20석도 끝내 받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오직 항일구국의 투쟁에 생애를 바쳤던 인물이다. 그가 대마도와 거문도에 두 번이나 유배를 당하면서 항일독립운동에 쏟은 공은 그 오점을 충분히 덮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라도 김개남의 굴레를 벗기고 본 모습을 바로 봐야 한다.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 김개남이나 의병장 최익현과 달리 임병찬은 너무 소외되고 있다. 임병찬 창의(의병을 일으킴) 유적지는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에 있지만 묘는 우리 고장 회문산 정상 아래인 구림면 안정리 산 3-1에 있다. 임병찬의 무덤은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아 황량하기 그지없다. 잡목과 잡풀로 뒤덮여 있고 비석은 동강나 있다. 원래 비석은 대석(臺石: 비를 받치는 받침돌)과 비신(碑身: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 개석(蓋石: 비신을 덮는 비의 상층부)으로 이뤄지는데 임병찬 묘의 비석은, 비신은 없어지고 대석과 개석만 남아있다. 비석의 몸체인 비신은 절취된 것인지 파손된 것인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제단석에는 ‘자헌대부 독립의군원수부 사령총장 평택임공휘병찬지묘’라 새겨져 있다.
이웃 정읍시는 순국선열들의 희생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올해 1억2800만원을 확보해 현충 시설물에 대한 점검과 정비에 총력을 쏟고 있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인 정읍 못지않게 우리 고장 순창도 동학농민혁명과 항일의병항쟁, 그리고 한국전쟁 등 한국근현대사의 주요 무대였다. 쌍치 피노리 전봉준 피체지, 의병군 순창 입성을 기념하기 위해 순창객사에 세워진 순창의병항일의적비. 구림 화암리 최익현 피체지, 회문산 빨치산 유적지 등 여러 근현대사 관련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그러나 임병찬 묘비의 경우처럼 안타까운 부분이 너무 많다. 구림 화암리 최익현 피체지는 최익현 피체지라는 표현보다는 순창 12 의사가 최후까지 항전하던 곳으로 인식되게끔 보완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또한 최익현과 임병찬의 부하였던 구림 국화리 출신으로 화암리와 회문산을 중심으로 1907년 정미의병 때 2년 가까이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펼쳤던 양윤숙(춘영) 의병장의 묘는 이정표조차 없어 찾기 어렵고 제대로 된 설명문 하나 없다.
다행히 황숙주 군수와 일부 공무원이 임 의병장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 순창군은 문화원과 향교, 시민단체들과 협의하여 임병찬 의병장의 묘지 문제를 비롯한 우리 고장의 근현대사와 관련된 인물, 유적지의 성역화 사업 등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사업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만 순창이 우리 역사의 한 주역이었음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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