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42)/ 산이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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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42)/ 산이 보다
  • 선산곡
  • 승인 2018.11.2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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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온이 위험경계선에 육박하는 것 같았다. 그 열기의 발산이 관자놀이를 지배하고 있었다. 착각처럼 안에서 욱, 욱,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눈으로 보는 밤풍경은 열린 카메라 렌즈처럼 희미하기만 했다. 갓길에 차를 세웠다. 명산이 올려다 보이는 마을, 다리 건너기 전 공터였다. 잠시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 운전석의자를 뒤로 눕혔다, 지독한 감기, 약도 먹지 않았는데 전신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혼미한 잠이 꿀처럼 달았다. 잠시 미명을 헤맨 뒤 몸을 일으킨 사이 차 안의 음악은 그치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말러의 교향곡 9번 4악장. 악장은 길었지만 내 잠은 짧은 편이었다. 장자도 아니었으니 나비의 꿈 따윈 꾸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이 밤은 더욱 깊었다는 느낌이었다.

 

제복의 남자가 차를 세웠다. 임시검문이었다.
“아이구, 과속하셨습니다.”
“과속을 했다구요?”
“안 한 과속을 했다고 했겠소?”
확인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언젠가 경험했던 ‘동생들 짜장 값이나 좀 주쇼!’했던 젊은 사람이었으면 차라리 애교라도 있었을 것을.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던 그는 상당한 지위에 있는 자였다. 더군다나 민중의 지팡이가 어쩌고저쩌고 한다는 간판문구가 버젓한 자기 근무처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였다. 지도자의 견장을 달았을 사람이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얼굴은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그래 내가 과속했을지 모르지. 딱지를 떼면 나만 손해 아닌가. 딱지의 3분의 1 값이면 남는 장사다. 룸미러 뒤에 꽂아 둔 지전을 꺼내어 주었다. 나도 이런 상황을 대비해 미리 준비했었고 그 준비상태를 점검하듯 그는 아무 죄의식 없이 내놔라했겠지, 그 공범의 자리. 찻길이 바뀌고 그 건물은 폐쇄되어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그 갑질에 대한 분노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큰 다리가 놓이기 전이었다. 배를 타지 않는 이상 육로를 이용해야만 하는 가깝고도 먼 고을이었다. 이 고을에 근무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출장 뒤 남은 시간, 버스를 탔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호수 아래에 있는 매운탕 집이었다. 이 호수주변의 매운탕은 맛있기로 소문이 나 있다는 말을 그는 힘주어 말했다. 메기탕, 그 안에 있는 시래기만 건져 먹는 나를 그가 질책을 했다. 입맛 까다로워 결혼하면 부인될 사람 힘들겠다고 투덜거리듯 그는 말을 잇고 있었다. “시끄러! 술이나 줘!”
맥주잔을 내밀며 내가 말했고 그는 야릇하게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너 술 먹일 거야 하는, 그가 작정하고 있는 뜻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산을 늘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있었다. 사계절의 변화를 꽃이, 녹음이, 바람과 눈비가 알려주었을 것이다. 이사했다는 그의 집이 어딘지 정작 나는 모른다. 전망 좋은 어느 근처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부질없음, 부질없었음. 먼 훗날 분명하게 뇌었을 그 짧은 언어를 위해 그 집을 알려고 하지 않기로 했다. 정리는 언젠가 끝이 있다. 그걸 믿는다. 언젠가는 이별. 그 부질없음을 언제는 모르고 있었더냐. 정리를 앞세운 거처의 확인이 무슨 소용 있는 일인가.

그 과거의 일들. 꿈 없었던 잠과, 약취(掠取)에 뇌동(雷同)했던 나약함과, 은밀한 만남이 뒤범벅이 된 과거의 에피소드들. 이 산 아래를 지날 때마다 짓는 쓴웃음의 값은 사실 미미하다. 그저 되새김하듯 기억나는 일일 뿐이다. 그 산에 계절의 빛이 녹슬어 있었다. 이젠 하얗게 눈 내리기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는 듯 모처럼 지나가는 나를 산이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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