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보물여행(51) 창씨개명 반대, 순절한 설진영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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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보물여행(51) 창씨개명 반대, 순절한 설진영 선생
  • 전예라 해설사
  • 승인 2018.11.29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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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떠나는 ‘순창보물여행’

 

맹세코 성을 갈지 않으리라.
만약 성을 갈고 사당에 참배한다면
조상의 영혼이 얼마나 놀라겠는가? 
차라리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리라.
이어온 전통 나로 끊어 죄인 되어
머리를 두르고 어디로 가랴. 
저 물에 몸을 던지네.

 

설진영이 몸을 던진 그 우물가에 있던 시다.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성씨(姓氏)까지도 버리라 하니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 더 살아야만 하는가.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생각하던 그는 마을 건너편 논 가운데 있는 우물로 가서 몸을 던졌다. 그 우물가에는 그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와 의관 위에 한 통의 유서가 얹혀 있었다. 1940년 5월 19일 새벽, 설진영의 나이 71세였다.
1940년,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1939년 11월 이른바 한국인의 ‘황민화(皇民化)’를 촉진하기 위해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한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모든 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성씨는 절대로 고치지 않겠다는 절명시(絶命詩)의 유서로 일제에 대항한 설진영은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 시해 후, 당시 호남 의병의 총수 기우만을 따라 왜병과 싸우다 1910년 한일합방이 선포되자, 순창으로 낙향했다. 나라를 찾으려면 무엇보다 인재양성만이 지름길이라는 생각으로 설립한 설진영 서실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방과 대청으로 이어져 있는데 방 사이 분합을 설치해 필요에 따라 한 공간으로 터서 사용할 수 있다. 1998년 1월 9일 전라북도기념물 제96호로 지정,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 25번지에 위치해 있다.
금과면 동전리는 1567년(명종22년), 동전설씨와 박씨, 김씨, 가씨 등 네 성씨가 정착하여 시작된 마을이다. 동전설씨는 설호진을 시조로, 설자승을 입향조로 하는 순창군 세거 성씨 중의 하나이다. 시조 설호진은 신라 개국공신 중의 한 사람이다. 그로부터 36세손인 설자승이 1126년(인종2년) 이자겸의 난을 피해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이어 그의 증손인 설신, 설공검, 설지충, 지충의 증손 설응, 그의 아들 설위로  내려온다. 설위는 금과 아미산 자락 동전리로 이거하게 된다. 동전마을은 순창설씨 집성촌으로 1419년(세종1년) 설위가 과거에 급제한 후 동전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동전설씨라 불리워진 그의 후손들, 설진영은 그 동전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장 시기는 나라의 운명에 먹구름이 일 때였다. 민비는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고, 일본은 그 민비를 시해하기에 이른다. 민비의 시체마저 불살라 버린 일본의 만행은 전국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그런 가운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1906년 기우만 의병장이 일본군에 체포되는 불운이 겹치게 된다.
“명현(名賢)은 영남에서 많이 나오고, 충절은 호남”이라는 말이 있다.
절의의 고장이라 불리는 호남의 순창, 어느 마을을 가더라도 충신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설진영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금과면 명산인 아미산 정기를 타고 굽이친 모양이 마치 와룡(瓦龍)같고 그 기슭이 꼭 구리 밭 같아 동전(銅田)이라 했다고 한다. 그 동전마을 입구에 위치한 설진영 서실은 우리의 문화유산이 아닌가 싶다.
초겨울 햇살을 흠씬 받은 설진영 서실이 마을 입구에 있다.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섰다. 깔끔하게 단장된 서실을 둘러보았다. 그가 몸을 던졌다는 담 너머 우물 자리에는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막연하게 이곳에 설진영의 우물이 복원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쉬운 생각에 그 정자 앞으로 가 보았다. 모의정(慕義亭) 현판 이름이 보인다는 것 외에 멀리서 본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 생각처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설진영의 우물을 한 번쯤은 물어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설진영 선생의 흔적 즉 우물을 찾아볼 수 없어 못내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정자 위로 올라가 현판을 둘러보았다. 모의정 건립현황, 모의정 찬조금 방명록만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은파(隱坡) 선생의 글을 읊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평산 병사 주변에는 들풀 꽃 어울리고,
동전골목 어귀에도 석양빛 비꼈는데,
동구 밖 수구 쪽엔 모의정자 어른대고,
피리소리 은은하게 더욱 맑게 굴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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