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긍지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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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긍지로 살자
  • 양장희 독자
  • 승인 2018.12.0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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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희(80 금과 고례) 전 순창군의회 의원

작고한 이규태 조선일보 주필은 전북 장수 촌놈(?)이다. 그가 조선일보 기자 공채2기로 합격하여 문화부 기자시절 실화다.
선배기자 들 앞에게 숨도 크게 쉬지 못한 시절에 미국에서 유명한 펄벅 여사가 한국에 와서 시골 여행을 한다는데 하필이면 쫄병인 나에게 동행 취재를 하란다. 1960년도 10월초였다. 선배기자들이 기여 가라면 기여야 했다. 고민 끝에 시골여행길이 고생길이 되지 않으려면 아무래도 낯익은 전라도 고향 쪽 시골길이어야 했다. 다음날 공항에 나가 그 녀(펄벅)를 면접했는데 첫 인상이 좋았다. 다만 헐벗고 굶주린 우리나라 속살을 보여주기 싫어 주눅이 들었다. 나는 나대로 연세대 공대 출신으로 꾸김없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 앞에 서있는 내가 너무 외소하고 초라했다.
60년도 초 시골여행의 이모저모를 말한다. 초등학교 학생들 의자 같이 좁고 딱딱한 좌석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데 그마저도 다행이다. 말이 좋아 버스지 엔진이 운전석 바로 옆에 있어 시끄럽고 덥고 입석 손님 100여명 이상 태울 요량으로 의도적으로 통로를 넓게 조작한 차량이다. 조수가 차 앞에서 스타징으로 힘차게 두 손으로 돌려야 가까스로 시동이 걸리고, 차장(안내양)이 오라이 하면서 큰 소리쳐야 차가 간다. 차가 가솔린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라이’ 힘으로 간다는 것을 그녀는 알까? 비포장도로여서 돌멩이 투성인 자갈길이라 빵구났다고 쉬고, 중간에 손님 있다고 멈춰 쉬고, 달리다가 전방에 손님이 많다 싶으면 급브레이크를 잡아 손잡이 없는 차내 입석 승객이 앞으로 휩쓸리게 하여 뒤쪽 입석자리를 확보케 한다. 노련한 운전수의 단련된 수법이다.
정류장에서 타는 승객들은 차표를 내고 승하차하기 때문에 그들(운전수, 조수, 차장)에겐 귀찮은 손님이다. 달리는 버스 중간(도중)에 타는 손님이여야 그들이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다. 그들의 외 수입(삥땅)이 된다. 자주 그러다보니 차내의 승객은 콩나물시루 속 콩나물이 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어느 시골 읍 장날인가 보다. 평생 걸어 다니다가 버스를 만나면 너나없이 앞 다투어 죽기 살기로 타는데 특히 깔 망에 돼지새끼를 담은 사람들은 승차를 거부 할까봐. 조수, 차장 없는 반대쪽으로 몰려와 이미 열려 있는 차 창문 쪽으로 마구 쑤셔 넣는다. 어린 돼지가 목 따는 소리와 함께 배설물을 찔끔 쐈는데 하필이면 그녀의 머리에 실례를 하는구나. 외국의 유명인사 환영퍼레이드 치곤 너무한다 싶다. 좁은 좌석에 엉덩이가 큰 그녀가 밉다가도 민망하다.
가을날과 노인은 믿을 수 없다더니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 싶더니. 버스 천장에서 빗물이 줄줄 샌다. 차내에서 비 맞은 손님이 “야! 안내양 똥차 비 샌다” 하면서 항의하자 안내양 말이 걸작이다. 이 똥차는 비 올 때만 비가 샙니다. 차속 사람들은 그야말로 미여 터지게 만원인데 소나기가 그치니 덮고 짜증이 더했다. 승객들이 “이 똥차 빨리 가라, 가면 시원할거다.” 이구동성으로 외쳤는데 운전수 말씀이 “이 똥차는 똥이 가득차야 갑니다.” 한다. 그녀와 내가 완전히 똥이 되었다. 그녀와 내가 왜 이런 고통스러운 곤욕을 치러야 하는가?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다. 가까스로 조수가 힘차게 스타징을 돌리는 덕분으로 아비규환 같은 시골읍장을 벗어나니 달리는 차 창속으로 시원한 바람이 밀려들어온다.
60년도 시골의 시월은 한창 수확기이었다. 나는 나대로 곱씹어 생각하면 생각사로 삶에 부족함이 없는 풍요로운 나라에서 태어나 더구나 대지의 소설로 노벨문학상 까지 거머쥔 그녀가 뭘 보자고 한국에 왔는지... 그것도 하필 시골 여행을 선택했는지 그녀는 분명 놀부 심보인가보다.
가난한 흥부집에 별 볼일 없는 처지임을 번연히 알면서 고생하며 찾아온 심보가 분명 놀부 심보라고 생각한 순간 그녀가 갑자기 나를 톡톡 치면서 흥분된 표정으로 “이 기자! 차 세워요.” 스톱을 연발하자 차가 정차하기 바쁘게 그 뚱뚱이가 날 세게 사람들을 비집고 빠져나가 하차하더니 반 미친 사람이 되어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댄다. 내가 보는 그 곳은 볏단 실은 소 구루마와 소 옆에 지게에 볏단을 지고 가며 소몰이 하는 농부가 전부였다.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이 기자 이젠 됐어” 서울 본사로 곧바로 가자며 “택시 불러요. 어서요.” 하도 재촉하기에 가까운 파출소에 연락하여 택시를 타고 머나먼 서울 길, 비포장 도로 돌멩이 길을 덜컹거리며 더디게 달려가고 있는데 그녀가 하는 말은 “미국사람 같으면 우마차에 있는 짐을 몽땅 싣고 사람까지 타고가면서 휘파람을 불며 갈 겁니다. 조상대대로 굶주리며 허덕이던 민초들이 감나무 마다 감을 모조리 따지 않고 몇 개씩 남겨둔 것은 일명 까치밥(새들 식량)이라 하지요. 그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민초들의 스스로 미덕임을 알고 시행했다지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습니다. 그동안 수 없이 말 만 들은 한국인들의 인정과 영특함, 참다운 인간임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갑니다. 이젠 됐어요. 땡큐∼” 외쳐 되면서 내 손을 그녀의 두 손으로 감싸주면서 “오늘 나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 고맙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이 기자 얼굴이 그늘지고 주눅 든 모습을 보았소. 당신은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태어난 걸 긍지를 가지고 사세요. 머지않아 빛나는 한국이 될 겁니다.”
이튿날 공항에서 굿바이 하며 펄벅 여사는 떠났다. 나는 구차하고 쪼들린 보잘 것 없는 한국인으로 태어난 걸 한 없이 후회하면서 살아왔던 내가 너무 미워 공항 한 구석에서 쪼그리고 않아 울고 또 울었다. 아니 바보처럼 통곡했다. 볏단지고 소 구루마(달구지) 옆에 소 모는 농부가 선비보다 더 착한 선비 정신이었음을 왜 나는 미처 몰랐을까. 감나무 까치밥 남겨둔 가난한 민초들, 우리 것이 세계 것이요. 세계의 자랑이다. 신기술과 함께 발 빠른 행동만이 살길이다. 하지만 “역사를 잊은 국민은 미래가 없다”고 처칠은 말했다. 역사를 거울로 삼아 긍지를 갖고 살자.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는 온누리에 호소문이었다.


= 이규태 전 조선일보 주필의 칼럼을 애독해 오신 필자가 화자(話者)가 되어 쓴 글입니다. 필자는 이규태 주필의 초급기자 시절, 펄벅 여사와의 취재 소회를 통해 우리 한국민족의 긍지를 강조해 주셨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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