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46)/ 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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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46)/ 수심
  • 선산곡
  • 승인 2019.01.23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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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카 소리가 들린다. 아파트 담벼락에서 중년의 남자가 주차 방지 시멘트 위에 걸터앉아 하모니카를 분다. 한가하다면 철모르는 소리이겠고 무언가 특이한 광경은 틀림없었다. 남자의 옆에서 부인인 듯,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시선은 먼 곳에 둔 채였다. 그 사람이 부는 곡목은 알 수가 없었다. 그다지 품격 있는 연주도 아니었다. 그러나 수심 찬 표정으로 서있는 부인과, 아랑곳 않고 하모니카만 불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슬픈 영화 한 장면 같아 보였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비 오는 날 밤으로 기억된다. 넷째 형이 어디서 구했는지 내게 하모니카를 선물해줬다. 듣기는 했었지만 처음으로 만져보는 악기였다. 그 즉시 들숨날숨 리듬을 표현해 보기 시작했다. 혀를 이용한 박자 맞추기는 나중의 일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처음 하모니카를 손에 쥔 날 바로 멜로디를 표현할 수 있었다.
군 입대 전까지 제법 나는 하모니카를 연주할 줄 알았다. 탱고 리듬도 정확히 끊는 실력이었지만 그 누구도 내가 하모니카를 불 줄 안다는 것은 알고 있지 않았다. 그 이후 하모니카를 분 기억이 없다. 다룰 줄 아는 악기라는 가벼운 인식으로 그야말로 수 십 년이 흘렀고 그때의 소년은 이제 늙은 노인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하모니카의 추억은 어린 날에 있을 것이다. 그것도 소녀가 아닌 소년이 부는 모습으로 상상이 된다면 억지일까. 그러나 상상이라도 좋다. 아카시꽃향기처럼, 소꿉친구와의 손장난처럼, 보리밭 언덕의 아지랑이처럼 하모니카의 이미지는 인생의 봄으로 비롯되어야 제격일 것 같다. 나는 예전처럼 하모니카를 불 수 없을 것이다. 50년 전에 손 놓아버린 뒤 이젠 운지 (運指)가 서툴러 도저히 연주할 수 없는 기타처럼 하모니카연주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참자. 무슨 악기든 연주할 수 없어도 그냥 좋을 나이 아닌가.
세계적인 하모니카 연주자 리 오스카의 <나의 길 My Road>을 들을 때마다 방랑자를 연상한다. 방랑의 길을 따라 흘러온 세월이라는 차분한 응시 때문인지도 모른다. 역시 하모니카 연주자로 유명한 하프롤리의 <좋았던 시절 Those Were The Days>을 들을 때도 그 생각은 같다. 슬프고 괴로웠을지라도 지난 추억이기에 아름다웠던 날들, 하모니카 소리엔 문득 서서 뒤를 돌아보게 하는 추억의 수심(愁心)과 귀소(歸巢)의 갈망(渴望)이 어딘지 모르게 숨어있다. 저 부부에게도 분명 존재하는 수심이 있을 것이다. 그 수심의 깊이는 어느 정도일까.
 
샴푸를 사기 위해 화장품 코너에 들렀다. 아가씨가 말을 건넸다. “오래만이네요.”대답대신 가만히 웃었다. “그간, 무슨 일 있으셨어요?” “…….” “항상 밝고 고우셨는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요.”여전히 말문을 닫고 있는데 아가씨가 서랍을 열더니 사탕 하나를 꺼냈다.
“이거 하나 드세요. 커피사탕이에요. 저도 우울할 땐 이 사탕을 하나 먹어요. 그러면 기분이 좋아져요.” 평소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탕이었지만 아가씨가 권하는 대로 입에 넣었다. 그 순간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화장품 코너를 다녀온 부인이 남편에게 한 말이었다. 세상을 사는 이들에게 수심의 깊이는 어디까지일까. 사람마다 헤어나야하는 그 깊이는 가지가지다. 그러나 그 정도를 아무도 알 수 없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의 그늘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운명은 스스로 개척한다지만 지닌 수심의 그늘이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나열된 종목은 아니다. 나의 것이 아니면 남의 수심은 과정으로만 보일뿐이다. 위로는 고마웠다. 부인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남편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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