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백두산은 언제부터 민족의 영산이 되었을까?
상태바
[시론] 백두산은 언제부터 민족의 영산이 되었을까?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1.23 16: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두산에 대한 조상들의 인식

한국ㆍ일본ㆍ중국의 동아시아 국가들은 나라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나라의 산(國山, 국산)’ 문화 전통을 공유하고 있다. 해발 3776미터의 후지산은 일본의 나라 산(國山)이다. 근대적인 산 정치학의 산물로 ‘후지산-신앙의 대상이자 예술의 원천’이라는 이름으로 200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중국의 국산은 여러 산으로 나뉘어 있다. 역대 황제들은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정통성을 과시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해서 엄청 높은 산 같지만 사실 1545미터로 우리의 백두산보다는 한참 낮다. 다른 의미에서 곤륜산도 중국의 대표 산이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여기에서 천하의 산줄기가 뻗었다고 믿어 왔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국산은 장백산(백두산)이었다. 그러나 세 산 모두 현재 중국인에게는 국산으로서의 의미가 퇴색했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나라 산이자 민족의 영산이다. 그렇다면 백두산은 언제부터 우리에게 민족의 영산으로 인식되고 국가의 제도화된 상징이 되었을까? 과거의 조상들도 현재의 우리처럼 천지에 오르면 자기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까?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 백두산은 나라의 영토 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를 대표하는 산으로서의 상징성을 갖기가 어려웠다. 백두산은 조선시대에는 주로 조선 산천의 조종산(祖宗山)이라는 지리적 표상으로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조선후기까지 이어졌으며, 1712년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면서 청국과의 국경 분쟁 과정에서 지식인들의 백두산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졌다.
그러나 조선후기까지 조상들의 백두산에 대한 생각은 오늘날과는 사뭇 달랐던 것 같다. 조선 후기 판소리사설이나 민화, 경복궁의 그림 등에서 백두산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민족종교인 동학, 증산교의 경전 기록에도 계룡산, 금강산, 모악산은 등장하지만 백두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오히려 통일신라 이후부터 조선시대까지 가장 사랑받은 산은 금강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민족의 상징, 백두산의 탄생
아편전쟁(1839-1842, 1856-1860)과 일본의 메이지유신(1867) 등 동아시아에 근대화의 ‘해일(海溢)’이 밀려오기 시작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우리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근대적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주 오랜 옛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때 근대 민족국가의 상징으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한 것이 단군(檀君)이었다. 그리고 단군신화가 일어난 공간으로서 백두산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신채호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에서 《삼국유사》의 단군 관련 기사에 나오는 태백산은 묘향산이 아니라 백두산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근거한 것이었다. 신채호의 주장은 명백한 실증적 증거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민족의 정체성의 근거를 발견하려는 시대적 요구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었기 때문에 광범위한 호응을 받았다.
이어 1909년 나철은 단군교(1년 뒤의 대종교)를 세우고 신채호의 주장을 이어받아 ‘백두산은 단군 탄강지(誕降地)’론을 강력히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주장은 1910년대 대종교 신도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고, 1920∼30년대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강연회, 전시회 등 각종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이를 더욱 확산시켰다. 그리고 이를 최남선 등이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려 노력했다. 그런 가운데 당시 언론에서 ‘백두산은 조선의 영산’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신채호와 나철은 백두산 상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백두산은 단순히 한반도 산맥의 조종산(祖宗山)에서 자주적ㆍ저항적인 민족 정체성의 상징으로 확장되었다. 실제적으로 20세기 초 한민족은 민족주의를 이념적으로 실현할 민족국가가 결여된 상태였지만, 백두산을 포함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민족주의의 상징체계는 한국인들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하였다.
20세기 초 변용된 백두산 상징의 내용은 한민족의 정체성, 한민족 역사를 통사적으로 파악하면서 특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일종의 사회 종교 차원의 의미를 부여하는 민족주의적 상징으로 재탄생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백두산은 이제 지리적 표상보다는 역사적 표상으로서의 의미를 더 갖게 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조합장 해임 징계 의결” 촉구, 순정축협 대의원 성명
  • 순창군청 여자 소프트테니스팀 ‘리코’, 회장기 단식 우승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