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1) 여암 신경준, 18세기 최고의 지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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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1) 여암 신경준, 18세기 최고의 지리학자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1.2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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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암 신경준 초상화.

1990년대 후반 이후 재조명된 지리서 《산경표(山經表)》는 국내 산행방식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산경표》가 재조명되기 전의 국내산행은 어느 한 산을 정해 정상을 오르내리는 ‘점 산행’이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산경표》의 발견은 산줄기를 이어가는 ‘선 산행(종주산행)’, 즉 백두대간 종주가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고, 미래에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우리 국토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사람이 바로 《산경표》의 저자로 알려지고 있는 여암 신경준이다.

 

묻혀졌던 조선후기 최고 지리학자의 부활

신경준(申景濬)은 조선 영조 때의 최고의 지리학자이자 실학자이다. 1712년(숙종 38) 순창읍 가남리 남산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781년(정조 5년) 70세에 사망했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菴). 아버지는 신숙주(申叔舟)의 아우 말주(末舟)의 10대손인 진사 내(淶)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 씨로 의홍(儀鴻)의 딸이다.
당대 천재 학사로 인정받아 여러 학문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지만 업적에 비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위당 정인보에 의해 세상에 처음 드러나게 되었다. 정인보는 사람들이 신경준과 그의 저작을 잘 모르는 걸 안타깝게 여겼고, 신경준이 국정에 깊이 관여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지 못 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신경준이 세상에 좀더 널리 알려진 것은 육당 최남선이 발간한 책자 《산경표》가 시중에 유포된 1980년대의 일이다. 《산경표》는 1913년 조선광문회에서 발간한 102쪽의 소책자로 여암 신경준이 지은 《동국문헌비고》 중 <여지고>의 ‘산수고’ 에 기초해서 쓴 책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 산줄기를 알기 쉽게 만든 이 책이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일반인들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산(山)잡지 《사람과 산》에서 이 책에 실린 백두대간과 9정맥을 직접 탐사하고 그 보고서를  잡지 《사람과 산》에 올리면서부터이다. 이렇듯 여암 신경준은 세인들에 의해 지리학자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네 살 때 천자문 읽고 여덟 살에 수학길

신경준은 태어난 지 겨우 아홉 달 만에 벽에 쓰인 글씨를 알아보았고, 네 살에 천자문을 읽었으며 다섯 살에는 시경을 읽었다고 한다. 또한 8세라는 어린 나이에 일찍이 부모의 품을 떠나 서울에서 유학했는데, 이 때의 경험은 그가 서울의 최신 학문을 접하고, 이를 통해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자양분이 되었던 것 같다.
신경준은 학문의 진리는 스스로의 사색과 경험의 결과로 찾을 수 있다고 여겨서 젊은 시절부터 산수 유람을 좋아했고, 이름난 산들을 두루 답사했다. 이때의 경험은 신경준의 교통과 지리에 대한 저서 편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신경준은 33세까지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살다가 33세부터 43세까지 고향에 묻혀 살면서 저술에 힘썼다. 이 시기에 그가 성취한 학문의 대략이 완성되었던 것으로 평가되며, 그 결과물은 《훈민정음운해》나 《강계지》 등의 저술활동으로 나타났다.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에 있는 신말주의 처인 설씨부인과 신경준 등이 태어나 살았던 터.

늦은 나이에 시작된 벼슬과 귀양, 그리고 복귀

 

중년 이후로는 관로도 트이기 시작했다. 그는 43세가 되던 1754년(영조 30) 지역 향시에 합격한 이후 사헌부 장령, 사간, 동부승지, 제주목사 등의 관직을 두루 거치며 58세 때에 고향 순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 해에 영의정 홍봉한이 임금에게 강력하게 천거하여 다시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다. 영조는 《동국여지편람》을 감수하여 편찬하게 하였다. 그 공로로 그는 승지의 자리에 올랐는데 영조는 서로 만남이 늦음을 한스럽게 여겨 “그대가 부모가 없다 하니 이제 섬길 사람은 나뿐인가 하오. 나를 버리고 멀리 가지 마오”라고 분부하였다.
이조정낭이던 최일남의 영의정 김치인 탄핵사건으로 충청도 은진으로 귀양 갔으나 60세 때 다시 승지, 북청부사, 강계부사, 순천부사를 거쳐 63세 때에는 제주목사가 되었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가 여암이 순창으로 돌아간 이듬해에 그에게 다시 승지의 벼슬을 주어 세 번이나 불렀으나 그는 이를 굳이 사양하고 그 다음해(1781) 5월21일에 친구들과 바둑을 두다가 현기증을 일으켜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 저술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驛)》: 훈민정음이 반포된 이래 최초의 국어 음운연구서임과 동시에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 이전까지의 유일한 한글 연구서였다.
《강계지(疆界志)》: 우리나라 역대 나라들의 경계와 지명 등을 고찰한 역사지리서
《도로고(道路考)》: 능행로, 전국의 주요 도로와 각지의 주요 시설까지의 거리는 물론 역로, 해로 등 전국의 도로망에 대한 정보를 총망라한 글.
《산수고(山水考)》: 우리나라의 산과 강을 각각 12개의 분합(分合) 체계로 파악한 한국적 지형학을 정리한 책. 전국의 산과 강을 거시적인 안목에서 조망하여 전체적인 체계를 파악하고, 촌락과 도시가 위치한 지역을 산과 강의 측면에서 파악하였다. 산줄기와 강줄기의 전체적인 구조를 날줄(경, 經)로, 각 지역별 산천의 상세하고 개별적인 내용을 씨줄(위, 緯)로 엮어 우리 국토의 지형적인 환경과 그에 의해서 형성된 단위 지역을 정리한 책으로 《산경표(山經表)》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경표(山經表)》: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와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의 산맥 체계(산줄기와 산의 갈래, 산의 위치)를 일목요연하게 표로 나타낸 지리서. 우리나라 산맥 체계를 백두대간과 연결된 1개의 정간ㆍ13개의 정맥 등 총 15개의 산줄기로 집대성하였다.
국정에서 소외된 채 재야에서 활동한 대부분의 실학자에 비해 신경준은 왕명을 받아 국가적인 편찬 사업에 그의 재능과 학식을 발휘하여 조선 후기 지리학의 발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신경준의 우리 산천에 대한 이와 같은 체계적인 파악은 전통적 지형학의 체계화로 평가할 수 있고, 나아가 근대지리학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의 다른 실학자에 비해 신경준에 관한 연구는 여전히 미진한 상태다.
우리 산악인들과 국민들에게 들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백두대간 종주’의 주역인 《산경표(山經表)》가 우리 순창 출신인 여암 신경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데 군민들이 자긍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산경표(山經表)》의 내용이 각종 교과서의 정규 지리개념으로 복원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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