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진 생가 터 등 성지화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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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정진 생가 터 등 성지화해야
  • 박진희 기자
  • 승인 2019.02.1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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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흥은 국가 보물급인 천년 고찰 구암사의 『월인석보』 권15, 하서 김인후가 수학하였던 낙덕정, 전북산림박물관, 광복 이후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의 생가, 김병로의 얼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대법원 가인 연수관, 기정진 선생 유허비가 있으며, 서편제의 창시자인 박유전 명창의 생가 터 등 크고 작은 관광 자원이 자리 잡고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내장산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북산림박물관과 구암사까지 둘러보게 된다. 관광 정보를 꼼꼼히 찾고 온 사람들은 가인 김병로 생가나 대법원 연수원까지 보고 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박유전의 생가 터나 기정진의 유허비가 있는 곳까지 찾아가는 사람들은 드물다. 서편제 창시자인 박유전의 생가는 아직 복원되지 못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무엇보다 기정진의 유허비는 도로에서 가까워 쉽게 가 볼 수 있는 곳이지만 이를 안내하는 표지가 없어 지나치기 쉽다. 어떻게 알고 찾아간다고 해도 비석만 덩그러니 있는 실정이다.
일반인들과 아이들이 찾았을 때 한자가 뒤섞인 유허비의 내용을 알아보기 힘들뿐더러 생가 터가 있거나 복원된 생가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유적지로서의 입지를 갖추지 못했다.
기정진(1798~1879)은 조선을 대표하는 마지막 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81세의 긴 생애 동안 거의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해 조선 유학의 중요한 주제인 주리론(主理論)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이념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해 근대의 격동에 대응한 주요 흐름인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을 태동시켰다.
그는 이념과 현실 모두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평가된다. 현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19세기 후반에 위정척사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시대적 조건과 한계 등을 감안한다면 이분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편 인근에 있는 장성 고산서원은 기정진이 조선 고종 15년(1878)에 ‘담대헌’이라고 이름 짓고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1924년에 후손들이 다시 지었으며, 1927년 ‘고산서원’ 이라고 쓴 현판을 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문화재청 홈페이지) 고산서원이 전라남도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돼 문화 유적지로 관리ㆍ운영되고 있어 기정진이 태어나 17세까지 살다간 동산마을이 방치된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서경덕ㆍ이황ㆍ이이ㆍ임성주ㆍ이진상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6대가(현상윤 「조선유학사」)로 꼽히기도 하는 대유학자의 고향이 이렇게 소외될 수는 없는 일이다. 복흥 대방리 용지마을에 있는 기정진 조모의 묘에 얽힌 일화와 어린 시절 시력을 잃은 사연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다.
박유전 생가 터 복원과 함께 기정진 생가 터 발굴 복원, 안내 표지판 마련 등을 통해 우리지역의 빛나는 유적을 알릴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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