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두문불출 유래 깃든 인계면 ‘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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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두문불출 유래 깃든 인계면 ‘호계사’
  • 임재호 전 풍산면장
  • 승인 2019.02.27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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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호 순창문화원 회원

 

향토문화유산으로 조명해야

호계사는 인계면 호계마을에 있는 사우(祠宇)로 고려말 조선의 개국을 끝까지 부정하고 충절을 지킨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의 상징 임선미(林先味)의 절의(節義)를 추모하여 배향(配享)한 곳이다. 두문동은 송도(개성) 궁궐 밖 지금의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혹은 만수산 골짝으로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고려의 유신들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고 외부와 단절하며 두문불출한 동리(洞里)를 지칭하는 말이다. 또, 72현은 영조실록에 기록된 임선미, 조의생(曺義生), 맹성(孟姓) 등 초기 두문동 3절(節)을 위해 조정에서 사액하고 추모하자 여말에 화를 당한 박문수, 민안부, 김충한, 성사제, 이의 등을 비롯 여말의 절신(節臣)을 추가 배향하였는데 후에 그들을 두문동 72현이라 칭하였다. 즉, 72라는 숫자는 두문동 유신의 정확한 숫자가 아닌 공자의 승당제자를 뜻하는 다수의 현인(賢仁)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실 두문동 72현이란 말은 영조 이전까지의 공식문헌인 실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들에 대하여 공식적인 언급을 엄격히 금지하고 항상 경계의 대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구전으로 민간에서 전해지다가 세상에서 공식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두문동에서 분사순절(焚死殉節)한 일이 있은 후 360여년이 지난 영조 즉위 16년째 되는 해 1740년 9월 1일이다. 영조가 송도를 출발하여 가마를 타고 제릉으로 가면서 부조현의 유래를 물으니 “태조께서 과거를 설행하였는데, 본도(개성)의 대족 50여 가문이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또, 그 동리를 두문동이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영조는 부조현의 유래를 듣고서 “고려의 충신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勝國忠臣勉繼世)”는 칠언시를 내리면서 두문동 이야기가 시작되고 처음 등장한다.  

 

두문동 72현 중 공식문헌에 기록된 인물은
임선미, 조의생, 맹성 세 사람뿐

이후 1751년 영조 27년에 “고려의 충신이여 지금 어디에 있는가, 특별히 그 동리에 비석을 세워 그 절의를 표하노라(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는 비문과 함께 “오직 고려의 사람 72인은 망국의 신하로 자처하고 스스로 뜻을 깨끗하게 하였도다. 그들이 들어간 동리가 있으니 어찌 문에 빗장을 걸어 닫고 나오지 아니하고 행적을 숨겼는가. 비록 몸은 죽었으나 그 절의는 사라지지 아니하였나니 그 충절을 지켜 죽음에 이름에도 후회함이 없었도다. 뒤에는 부조현이 있고 앞에는 계관현이 있도다. 이름은 비록 다르나 그 뜻을 취함은 같으니 오직 임선미, 조의생, 맹성 세 사람만이 전하고 나머지는 기록이 되지 못하였도다. 내가 옛날에 이곳을 지나가다가 유지를 물어본 적이 있는데 지난날을 생각하니 감회를 그칠 수가 없구나.”라고 치제문(致祭文)을 지어 내렸다. 이렇게 두문동 3절에 대한 추모 제향(祭享)이 시작 되었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1783년(정조 7년)에 개성 유수 서유방의 상소가 있자 명을 내려 성균관 송경반서에 임선미, 조의생, 맹성 등 두문동 3절을 위한 제사를 지내도록 사액(賜額)을 하고 사당을 세우게 하니 이것이 곧 표절사(表節祠)이다. 이 내용은 해동충의록과 송도지 또, 승국명류표방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두문동 72현을 추모하여 제향해 오던 표절사 등의 서원이 1868년 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서원 27개와 사당 20개만 남고 모두 철폐되니 조선 개국을 부정한 고려충신 두문동 72현을 모신 표절사가 존치될 리 없고 철폐됨에 따라 제향이 중단되고 만다.
그 이후 1932년에 두문동이라 부르던 개풍군 광덕면 만수산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장성군 남면 삼태리 만수산에 강원삼이라는 광산군 비아면 도촌리 거부가 경현사(景賢祠)를 건립하고, 두문동 72현과 여말 충신 58현을 합하여 130위를 모시니 영ㆍ호남 유림들이 춘추로 그들을 향사하고 절의 정신을 추모했다.
이어 1934년에는 임선미의 후손 임하영(林河泳)이 주축이 되어 개성에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을 창건하고 두문동 72현을 비롯 고려말 불사이군 대의를 위하여 순절한 정몽주, 이색 등 48현을 더하여 120위를 모셨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경현사 마저 훼철되고 그 곳에 봉안되었던 위패는 각각의 후손들이 분산 봉안하게 되었는데, 그때 임선미의 위패도 1943년 10월에 순창임씨 종인(宗人)들이 호계사를 건립하고 모셔와 봉안했다. 그리고 매년 음력 3월 17일이면 순창향교 유림의 집례로 두문동 임선미의 절의 정신을 추모하여 제향해 왔다. 그러다가 순창임씨 종중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유림의 집례 경비가 부담이 되자 근래에는 후손들만이 제향하고 있다.
이처럼 호계사는 우리 사회에 회자되는 고사성어 두문불출 유래가 깃든 유서 깊은 사우인 것을 새삼 밝히고자 한다.

충절의 고장 순창의 효시 임선미,
호계사 제향 순창향교 집례 부활해야

임선미는 두문동 3절(節)이요, 두문동 72현을 대표하는 절의의 대명사로서 성리학의 유생들에게 충절의 표상이 된 그에 대해 규장각 충렬록 두문동제선생실기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임선미의 자는 양대(養大)요 호는 두문제(杜門齊) 또는 휴암(休庵)이니 순창인(淳昌人)이고, 휘는 선미(先味)이다. 공민왕조에 태학생이었는데 온 세상이 상례(喪禮)를 단기로 치름을 개탄하고 박상충과 더불어 교유하며 예제(禮制)를 강정하여 3년 상(喪)을 행하게 하였으며, 유도(儒道)를 천명하며 퇴폐한 세속을 바로잡기에 힘써 그 명망이 세상을 움직였다. 그러나 나라가 바뀌자 조맹(曺孟) 양현과 함께 절의를 지키며 일생을 마쳤다. 영조 신미년에 어제어필로 비를 세워 제사를 지냈으며, 정조 계미년에 표절사를 세워 사액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라고 적었다.
임선미가 순창인이라 한 것은 그의 아버지인 임중연(林仲沇)이 충숙왕 때 우상시 밀직부사 지밀직사사 찬성사에 이어 추성양절공신으로 순창군(淳昌君)에 봉해져 첨의찬성사에 이르자 그를 파시조로 순창관(淳昌貫) 순창임씨로 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출생을 공민왕조 정축생(1337년)이라고 하나 정축년은 공민왕 때는 없으니 충숙왕 6년의 정축생이라야 타당하다. 이는 1394년 그가 58세에 두문동에서 분사순절한 것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성석린(成石璘 1338~1423), 박상충(朴尙衷 1332~1375), 홍중선(洪仲宣 ? ~1379) 등과 교우하며 당시 부모상의 백일 단상(短喪) 풍습을 버리고 고례(古禮)에 따라 3년상으로 예제를 정한 것 들을 볼 때 정축생인 1337년생이라야 박상충, 성석린 등과 벗으로 지낼만한 나이가 되고 그런 제도를 행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공민왕조에 태학생이라고 적고 있으니 두문동에서 화를 당한 1394년까지도 태학생이라고 하면 맞지 않다. 이는 당시 성균관 태학생 수학 기간이 9년인 것을 볼 때나 세상 상례를 3년상으로 행하게 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 등을 볼 때, 성균관 태학생이 아닌 태학사(太學士)일 것으로 봄이 옳다고 본다.

호계사 절의(節義) 정신과
삼인대 대의(大義) 정신은 향토 정신문화 유산

 
화해사전(華海師全) 부언지록(附言志錄)에 관덕제 변윤종이 듣고 기록한 것을 보면 1392년 7월에 고려 왕조의 국운이 다하자 충신과 열사들이 신하로서 신조(新朝)에 신복할 뜻이 없어 일제히 송도의 남쪽 고개 부조현으로 올라가서 관복과 관모를 벗어 걸어 놓고 폐양입을 쓰고서 각자가 그 뜻을 말했다고 전한다. 이때 임선미, 조의생, 맹호성, 이경은 다 같이 정축생이며 포은과도 동갑이었다고 하고, 1392년 4월 4일에 정몽주가 순절하자 공을 비롯한 고려 유신들이 그 해 두문동으로 은거한 후 2년 뒤 1394년에 순절했으니 공의 나이 58세라 한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그의 선친 임중연이 1373년 71세에 돌아가셨을 때 순창에 있는 묘소에서 3년상 시묘(侍墓)를 치렀다 하니 그때 나이가 36세정도로 기산이 된다. 만약 일설에 따라 1362년생으로 32세에 순절했다고 하면 선친의 시묘를 11세에 했어야 하고 박상충, 성석린 등과 나이 차가 커서 교유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고려명신전의 고려충신 12명 속에도  임선미 기록이 나타나 있고, 승국명류표방록의 고려충신 3인 3절(三仁 三節) 인물에도 3인은 정몽주, 이색, 길재를 3절에는 임선미, 조의생, 맹씨를 적고 이들은 두문동으로 들어가서 함께 절의를 지키다 마쳤다고 했다(入杜門洞 同節而終).
이처럼 임선미는 여말 충절의 대명사인 두문동의 대표적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고, 그가 순창인임에 또한 분명하다. 그러므로 충과 효를 유교의 최고 덕목으로 하던 조선시대 두문동의 중심 인물인 임선미가 순창인 이었으니 후일 충절의 고장 순창의 명성을 형성하는 효시가 됨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삼인대의 대의(大義) 정신과 함께 호계사의 임선미 절의(節義) 정신을 향토 정신문화 유산으로 승화 발전시켜 나감이 옳다고 본다. 이를 위해 순창향교의 제향 집례(集禮) 부활이 선행되어야 하며, 「삼인문화선양」처럼 「두문제문화선양」을 위한 순창군과 순창문화원의 관심이 절실히 필요하다.

※ 임선미의 세계(世系)는 임팔급(林八汲)을 시조로 하여 고려 의종 때 좌의정에 오른 문정공 광비(光匪)의 8세손이며, 대문장가 서하(西河) 춘(椿)의 7세손으로 순창백(淳昌伯) 임연(林演)의 손자요, 순창임씨 파시조인 임중연(林仲沇)의 아들이다. 임선미의 아들 셋 중 두문동 화가 있은 후 둘째(用達)만 송도에 남고 첫째((用培)와 셋째(巨桂)는 순창에 은거하다 셋째는 후에 홍성으로 이거했다. 용배의 아들 치지(致之)는 둘째 향(香)을 순창에 두고 장자 회(檜)와 화순에 이거했다. 순창은 향의 손이 주로 세거를 이루고 있으나 거계의 후손 일부가 유등면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순창임씨 족보는 1789년 정조 13년에 임중연을 1세로 최초 제작한 후 1841년 헌종 7년에 시조를 팔급(八汲)으로 하고 득우(得雨)를 1세로 하여 순창임씨 2회보가 수보된 후 1901년 고종 광무 5년에 평택임씨로 변경한 것이 나타난다.
※ 참고문헌 : 高麗史, 華海師全, 慶賢祠錄, 玉川文化(제2집), 平澤林氏淳昌貫族譜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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