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村(강촌) 강마을에서 -두보
淸江一曲抱村流(청강일곡포촌류) 해맑은 강 한 굽이 마을을 안고 흐르는데
長夏江村事事幽(장하강촌사사유) 긴 여름 강마을에는 만사가 여유롭다
自去自來堂上燕(자거자래당상연) 절로 갔다 절로 오는 것은 들보 위의 제비요
相親相近水中鷗(상친상근수중구) 친하고 서로 가까이 하는 것은 물가의 갈매기로세
老妻畵紙爲碁局(노처화지위기국) 늙은 아내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稚子敲針作釣鉤(치자고침작조구) 어린 자식은 바늘을 두드려 낚싯바늘을 만드네
但有故人供祿米(단유고인공녹미) 병약한 몸이라 필요한 것은 약뿐이니
微軀此外更何求(미구차외갱하구) 미천한 이 몸에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중국에서는 최고의 시성(詩聖)을 두백(杜白)이라 부른다. 이는 두보와 이백을 일컫는 말인데 두보는 당시의 사회와 생활 속에서 보고 느낀 사실을 시로 썼고 이백은 좀 초연한 입장에서 낭만적인 시를 썼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청렴결백했고 바르게 살면서 정의로움을 사랑했다.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에 늘 불탔고, 또 예술과 자연을 사랑했다.
그러나 두보의 시 시계는 언제나 백성들의 현실 그 생활 속에서 함께했다. 유명한 춘망(春望)의 시에서 엿보듯 “나라는 망했는데도 산하는 여전하구나(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국파산하재 성춘초목심)라 썼고 그 외에 ‘빈교행(貧交行)-가난할 때의 사귐’, ‘월야(月夜)-달밤’, ‘곡강(曲江)-굽이치는 강’, ‘북정(北征)-북쪽으로 가며’, ‘병거행(兵車行)-병사들과 같이’ 등 1500여 수의 시와 함께 절창의 시를 남겼다. 이 모든 시들은 당시의 백성들과 함께 겪으며 쓴 시로 중국인들은 그 시대의 역사를 시로 썼다 해서 시사인(詩史人)이라 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빈부의 격차는 있기 마련이지만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가 썩어나는데 길가에는 못 먹어 얼어 죽은 해골이 뒹구네(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 주문주육취 노유동사골)”라는 시구에 이르면 당시의 사회상을 엿보면서 시인의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위 강촌에서의 시는 이 고난의 여정 중에서도 온 가족이 평화로운 순간을 보내고 있기에 골랐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 “미천한 이 몸에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에 이르면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는 듯 경외스러운 마음이 든다.
※두보(杜甫) 712~770, 중국 당나라 때 시인, 1500여편의 시를 남겼는데 중국에서는 시성(詩聖)으로 불리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