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49)/ 세월, 그리고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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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49)/ 세월, 그리고 친구
  • 선산곡
  • 승인 2019.03.14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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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찻집에서 읽은 허연의 시집, 제목은 잊었다. 그러나 첫 장에 누군가 써 놓은 글이 있었다. 차창 밖 이팝꽃을 보며 오다보니 어느새 고향인 전주였다는 편지글. 과거 6학년 9반이었던 친구가 친구에게 전하는 글이었다. 시집을 사서 친구에게 주기 전에 쓴 글이었는지, 아니면 친구가 지니고 있는 시집의 첫 장, 제목이 있는 공간에 다급하게 썼던 글인지는 알 수 없다. 편지지에 써야한다는 격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주고받은 이들이 누군지 모르지만 넉넉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었다.
짐작은 간다. 시집에 글을 남긴 사람은 남자고 상대는 여자라는 것. 편지를 쓴 사람의 이름은 낯설지 않다. 그런 이름은 남자만이 가지고 있다. 동명이인,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한 사람은 제자였고 또 한 사람은 서양화가이며 또 한 사람은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 시인은 작고한지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주고받은 편지가 많았으니 그 시인 생전의 필적도 나는 안다. 그들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사람의 필적은 상당히 달필이었다. 내가 모르는 또 한 사람의 동명이인인 것이다.
그 찻집 벽을 장식한 낡은 책장이 있다. 책장엔 커피에 관한 전문서적도 있고 지난날 흔적으로 보이는 원고지로 묶은 방명록도 있다. 때 지난 문예지, 약화사전, 종교적 사색을 담은 책들이 꽂혀있다. 이 찻집 주인이 그 사연을 받은 주인공이며 초등학교 6학년 9반이었으리란 짐작만 한다. 찻집에 갈 때마다 어린 시절 추억을 지닌, 그들만의 여정이 따뜻한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을 하며 커피를 마신다.

 

전화가 왔다. 낯선 번호다. 밤 깊어 걸려오는 전화는 긴장을 증폭시킨다. 그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는 돌연히 생긴 일 아니면 삶의 리듬이 방해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굵다, 한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내 이름을 부른다. 마치 신원 확인을 하듯 이름의 주인공이 분명하냐는 말투다. 상대방이 한동안 신원을 밝히지 않는 짧지 않은 시간을 실랑이를 한 기분으로 기다린다. 한참 만에 그가 자기 이름을 밝혔다. 이어진 말이 ‘너 나 알아?’였다. 뜻밖이었지만 답변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내리 같은 반이었던 친구의 이름이었다. 그가 머뭇거렸던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그가 울고 있었다.
“야, 나 눈물나온다. 네 이름을 부르니 눈물이 나온다.”
친구들끼리 만난 자리에서 내 전화번호를 알게 됐다는 그가 정말 끅끅 울고 있었다. 서울로 마실 간 한 친구를 통해 내 근황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내가 너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지? 너는 몰랐을 거야.”
무슨 대화를 했는지 더 기억나지 않았다. 울고 있는 친구의 감회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울지 마라’ 그 말은 한 것 같았다.
“내가 너 만나러 간다. 전주라지? 내가 분명히 간다. 우리 만날 수 있지?”
마치 적토마라도 타고 올 듯 그는 다짐을 했다. 그 시절, 우리끼리의 눈빛은 그다지 섬세하진 않았지만 인성 좋은 친구로서의 기억은 항상 남아있었다. 같은 반 45명 중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는 이제 몇이나 남아있을까. 우연히 소식을 듣고, 전화 통화를 하면서 눈물을 흘릴 친구는 정말 몇이나 될까.
가슴이 훈훈해 진다. 내가 너 좋아했는데 넌 그걸 모르지? 어쩌면 내가 할 말을 그가 했는지도 모른다. 50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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