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50)/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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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50)/ 알 수가 없다
  • 선산곡
  • 승인 2019.03.2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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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엄브렐라 아카데미>라는 미국 드라마를 보는 중이었다. 어느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귀에 익었다. 무슨 뜬금없는 이 음악인가 하다가 금방 이해를 했다. 드라마는 세상의 종말을 미리 알고 막으려는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다. 복잡한 스토리 안에 그들을 쫓는 남녀 한 쌍, 하늘(저승?)에서 내려주는 명령을 받고 활동하는 킬러 조(組)가 있다. 그 업무를 수행하던 중 나이 든 할매와 눈이 맞은 중년의 남자킬러가 이 짓 못하겠다고 파트너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세상의 종말이 겨우 사흘 밖에 남지 않았는데 하늘의 명을 거역했다가는 내가 널 죽이겠다는 여자킬러에게 ‘너랑 3,000일을 함께 하느니 그 사흘을 택하겠다. 이년아.’ 하는 말을 내뱉고 나간다. 그 남자가 떠나가는 장면부터 흐르는 음악이 영국의 락 밴드 6인조그룹 <라디오헤드>의 <Music Exit(음악 출구)>이었다. 원래는 96년판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엔딩 크레딧이 시작하자마자 흘렀던 음악이다.
영화감독 바즈 루어만이 라디오헤드의 싱어 겸 작곡가인 톰 요크에게 영화 삽입곡을 의뢰했다. 톰 요크가 ‘재앙이 시작되기 전 도망가야 하는 두 사람을 그린 노래’라고 했으니 드라마에서 사흘 남은 종말이라는 전조가 공감이 간다.
톰 요크가 <Music Exit>를 작곡하면서 쇼팽의 전주곡 4번을 듣고 공감을 얻었다고 했다. 15번 빗방울 전주곡이 유명한 24개의 전주곡 중 이 4번째 곡의 분위기는 짧지만 처절하다. 쇼팽의 장례식장 때 연주된 곡이 바로 이 4번이었으니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선지 그 음악이 내겐 작은 파문이 아니라 아예 가슴 와작와작 뜯어놓는 비명에 가깝다. 엔딩 크레딧을 전제로 한 것이었는지 제목도 어쩐지 수상하다.

“내 작품을 이렇게도 완벽하게 영화로 만들 수 있다니.”
죽은 셰익스피어가 저승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는 완벽한 연출이 68년판 프랑크 제피넬리 감독의 <로미오아 줄리엣>이다. 로미오는 레오나르도 파이팅, 줄리엣은 올리비아 핫세. 영화가 시작되면서 흘러나오는 나레이션은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목소리다. 로렌스 올리비에, 셰익스피어의 극중 인물에 타인이 넘볼 수 없는 해석력을 가진 자로 유명하다. 1989년 82세로 영면했으니 그가 세상을 뜬 지도 오래 되었다. 1907년생으로 오늘날로 셈하자면 112세. 영국의 전설적인 배우의 목소리가 그 영화에 살아있다.
생각해보니 세월의 흐름이 빠르기도 하다. 그 로미오였던 레오나르드 파이팅은 나와 동갑이었으니 지금 70줄에 나앉아 어떤 얼굴로 변했을지 모르겠다. 로미오와 줄리엣 역을 더 이상 넘볼 수 없는 캐스팅이었다는 것은 다분히 나의 욕심일 뿐이지만 96년 판의 로미오 역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였다. 영국의 고색창연한 성곽에서 이루어진 연출이 아닌, 현대판 각색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이젠 나이들만큼 들어 중년을 넘어섰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본 아역배우의 얼굴이 저리 변했나, 생각해보니 덧없이 흐른 세월이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영화와 그 영화 주인공의 적역(適役)과 OST(오리지널 사운드트랙)에 소회(所懷)가 연결된다. 새삼 확인한 것은 세월일 뿐인데 어쩌면 그것이 비극(悲劇)이라는 점이다. 재앙을 앞둔 비극이면 <로미오와 줄리엣>도 마찬가지요, 덧없음도 따지고 보면 거기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눈앞의 현실이다. 그게 인생이라는 게 내가 요즘 얻은 결론이다.
라디오헤드의 <Music Exit>를 거듭 듣고 있다. 내 안 깊이 숨어 있는 그 무엇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톰 요크가 비명을 지른다. 우울하면 듣지 말아야 한다고 내 스스로 다짐을 했던 음악인데 자꾸 다시 되돌리는 버튼을 누르는 내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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