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궁비견/ 음모가 드러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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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궁비견/ 음모가 드러나긴 했지만
  • 정문섭 박사
  • 승인 2019.04.03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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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 지도 도 窮 다할 궁할 궁 匕 비수 비 見 볼 드러날 견(현)
정문섭이 풀어 쓴 중국의 고사성어 194

《사기》 자객열전에 나온다. 지도가 펼쳐지자 비수가 드러나다. 음모가 드러나다. 발각되다.
남쪽지방의 Y군(郡)은 역대 군수들이 중간에 늘 구속되어 재선거를 치르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필자가 아는 P도 그중에 한 사람으로서 검찰이 뇌물죄로 여러 증인과 증거를 대는 바람에 구속이 되었고, 하지만 그는 그런 사실이 없었으므로 무죄를 주장하였다. 결국 법정이 이를 수용하지 않아 군수자리에서 쫓겨나고 3년간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감옥에서 나온 후, 그는 너무 억울하여 자기가 왜 그리 되었는지를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자기에게 불리하게 증언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 증거란 것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등 여러 가지를 은밀히 알아본 것이다. 그러나 그 당사자들이 입을 다물어 진상을 알아내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려웠다. 다만, 군수시절 진급에서 떨어진 주사보 세 사람이 공모하여 말을 맞추고 빠져나갈 수 없는 증거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정황상의 짐작만 되었을 뿐, 그것을 증명할 결정적 한 방이 부족하였다.. 
소멸시효가 얼마 안남아 자포자기하고 있던 어느 날, 정말 다행히도 한 중년부인이 USB를 들고 그를 찾아왔다. 그 세 주사보 중의 한 부인으로 얼마 전 이혼을 당한 사람이었다. 셋이 P군수를 내쫓기 위해 모의하고 담당검사가 성과를 내려는 욕심이 포함된 음모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증거를 확보한 것이다. 마침내 ‘도궁비현’으로 P의 억울한 한이 풀어지긴 했지만…, 너무 늦었다. 그 음모는 오래도록 감춰져 있었고 그 후유증은 깊었다. 그는 이미 늙었고 홧병으로 인한 조울증에 걸려 제대로 된 사람노릇을 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전국시대 말, 위나라 사람으로 협객인 형가(荊軻)는 여러 곳을 방랑하며 현인·호걸들과 교유하다가 연(燕)에 들어왔다. 연의 유명한 처사인 전광(田光)이 형가와 교유하면서 그가 독서와 검술을 좋아하고 진정한 용기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형경((荊卿)이라 부르며 두텁게 대우하였다. 
한편 이즈음, 진(秦)의 볼모로 있던 연의 태자 단(丹)이 도망하여 귀국하였다. 진의 왕자 정(政)은 조나라에서 볼모로 지낼 때 같은 볼모신세여서 단과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정이 왕이 된 후 단이 진에 볼모로 있을 때 단을 소홀히 대우하고 무례하게 굴었으므로 단이 매우 섭섭한 마음과 더불어 사무친 원한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본국으로 돌아온 단은 진왕에게 보복할 적당한 인물을 구하기 시작했다.
태부(太傅)인 국무(鞠武)가 단에게 ‘단지 원한만으로 진의 역린을 건드리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또 진의 장군 번오기(樊於期)가 연나라로 망명하였을 때에도 ‘진을 자극하지 않도록 번오기를 흉노로 보내고 제·초와 연합하여 진에 대항해야 한다.’고 간곡히 건의했지만 단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국무가 할 수 없이 전광을 소개하였고 전광은 형가를 추천하였다. 전광은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목을 찔렀다. 단이 진왕암살계획을 제안하였을 때 형가는 처음에는 사양하였으나 단이 간곡히 요청하는 바람에 흔들려 승낙하고 말았다.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진왕에게 신임을 얻어야 하니 금 천 근과 만 호의 식읍이 상으로 걸린 번오기의 목을 갖고 가야합니다. 또한 연나라의 요지인 독항(督亢, 하남성)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태자 단이 자신에게 몸을 의탁하러 온 번오기를 죽일 수 없다고 말하였다. 형가가 은밀히 번오기를 만나 사정을 말하고 연나라의 근심을 없애고 번오기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그의 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번오기는 형가의 뜻을 받들어 스스로 목을 찔렀다. 단은 번오기의 목을 함에 넣고, 또 천하에 가장 날카로운 비수를 구하여 칼날에 독을 물들여 실험까지 마쳐 암살 준비를 완료하였다.
하지만 준비가 끝나고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 형가가 함께 갈 친구를 기다리느라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단이 여러 차례 형가를 재촉했다. 형가는 할 수 없이 단이 추천한 용사 진무양(秦舞陽)과 동행하기로 했다. 진무양은 13세에 사람을 죽였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사람이었지만 형가의 의중에 들지는 않았다.
형가는 진에 도착하여 총신인 몽가(蒙嘉)에게 뇌물을 주며 ‘단이 번오기의 목과 독항을 바치고 신하가 되겠다.’고 말했다며 좋게 말하게 하였다. 진왕이 기뻐하며 구빈(九賓)의 예를 베풀어 궁에서 형가일행을 맞이하였다.
형가는 번오기의 머리가 든 함을 받들고, 진무양은 지도가 든 함을 들고 진왕 앞으로 나아갔다. 물론 지도 안에는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형가가 지도를 꺼내어 왕에게 바쳤다. 진왕이 지도를 다 펼칠 즈음에 속에 든 시퍼런 비수가 뎅그렁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형가가 재빨리 왕의 소매를 잡고 비수를 잡아 왕을 찔렀다. 그러나 진왕이 몸을 빼 피하였다. 계속하여 진왕을 쫒아 찌르려 했으나 진왕이 기둥 뒤로 숨었다가 칼을 빼어 형가를 쳐 왼쪽 다리를 베었다. 여러 군데에 상처를 입어 일이 어그러진 것을 안 형가가 기둥을 잡고 주저앉으며 진왕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살려는 마음이 있었구나. 난 너를 잡아 약속을 받아내어 단에게 보답하려했는데 그르쳤구나.”
이 사건으로 진왕은 크게 노하여 병력을 증강시켜 조나라에 보내는 한편, 장군 왕전(王翦)에게 명령을 내려 연나라를 치게 하였다. 5년 후, 진왕은 위·초·연·제를 차례로 멸망시켜 BC221년 마침내 진시황이 되었다.
사마천은 이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을 ‘형가의 의협심과 불운’에 중점을 두고 좀 더 자세히 또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후세 사람들은 형가의 이 암살계획의 실패를 이 성어로 만들어 ‘음모가 드러나다.’라는 의미를 두어 사용하였다.
이 형가의 일은 오늘날에도 소설·연극·연속극·영화 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왔다. 대개 폭군이나 독재자의 암살이나 정권 전복을 기도하다가 ‘도궁비현’하여 거사에 실패하고 오히려 주멸을 당한 경우를 안타까워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최근 진시황의 ‘중국통일’을 찬양하며 ‘중국몽’을 지향하는 중국인들이 만약 형가가 진왕 암살에 성공하였더라면 중국 역사에 ‘중국대통일’은 더 지체되었을 거라고 말하며  형가를 중국통일을 저해할 번하였던 인물로 폄하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글 : 정문섭 박사
     적성 고원 출신
     육군사관학교 31기
     중국농업대 박사
     전) 농식품부 고위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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