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6) 서편제 시조 박유전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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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6) 서편제 시조 박유전 명창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4.1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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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인물열전(6)

 

1993년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된 영화 <서편제>는 임권택 감독이 이청준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 <서편제>는 단성사에서 196일 동안 백만 관객을 동원하여, 단일관에서 100만 관객을 돌파하고 싶어 했던 한국영화인들의 오랜 꿈을 이루어준 영화다. 같은 해 흥행 1위였던 세계적인 초대박작 <쥬라기 공원>의 서울 관객이 106만이었으니, 당시 영화 <서편제>가 떨친 흥행 위력을 알만하다. 전국 430여개의 극장(2017년 기준 스크린 수는 2766개)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요즘 같으면 천만 관객을 가볍게 넘겼을 것이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서편제 신드롬’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고 우리 사회는 판소리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외면 받아왔던 전통적인 ‘우리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다음 해인 1994년이 ‘국악의 해’로 정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던 것이 있다. ‘서편제’가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동편제와 서편제

제(制)는 판소리가 전승되면서 전승계보에 따라 자연스럽게 음악적 특성에 차이가 생기게 마련인데 이를 제라고 한다. ‘제’라는 용어는 1940년에 출간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처음 등장한다. 동편제와 서편제 등의 판소리 유파의 분화는 19세기 후반에 발생하여 20세기에 개념이 정리된 것으로 판단된다.
'동편제'는 씩씩하며 음의 꾸밈이 적은데, '가왕(歌王)'이라고 불린 송흥록을 시작으로 해서 그의 동생인 송광록, 송광록의 아들인 송우룡으로 이어지는 송씨 집안의 판소리를 원조로 친다.
이 소릿제가 최고의 세력을 뽐내며 인기상승 중이던 구한말, 박유전 명창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서편제’는 주로 계면조(界面調)를 써서 슬프고 원망스런 느낌을 처절하게 잘 그려내고, 정교하면서도 화려하고, 장단의 변화를 통해 뛰어난 기교를 보여준다. 박유전 명창이 송씨 집안의 판소리와는 대조적인 창법으로 만든 소리제이다.
어떤 이들은 동ㆍ서편제의 지역적 기준을 섬진강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동편제와 서편제의 지역적 분류를 호남정맥으로 본다. 《조선창극사》에서는 “동서의 유래는 송흥록의 법제를 표준하여 운봉, 남원, 순창, 곡성, 구례 등지를 동편이라 하고 박유전의 법제를 표준하여 광주, 나주, 보성, 강진, 해남 등지를 서편”이라 하였다.

 


외눈박이의 설움, 천상의 소리가 되다

 

조선후기 8대 명창이자 서편제의 창시자인 박유전(朴裕全, 1834-1904) 명창은 헌종 무렵인 1835년 순창군 복흥면 서마리 마재(현재의 하마마을)에서 5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박유전은 복흥의 가난한 소리꾼 아들이었다. 그는 어려서 한쪽 눈을 잃어 외눈으로 지내면서, 주변의 천대를 받고 서러움을 안고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큰아들에게만 소리를 가르치고, 그에게는 허드렛일만 시켰다. 그러나 타고난 재주는 어쩔 수 없었는지, 귀동냥으로 배운 소리가 형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 장애가 오히려 그를 더욱 단단하게 다듬어 소리꾼으로 이끌어 갔다. 천부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가 장애라는 고독과 한을 소리에 담았던 것이다.
그의 소리는 이처럼 복흥에서 싹이 트고, 18세 무렵에 전남 보성군 대야리 강산마을로 옮겨가 예술세계를 완성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전설을 남겼다.
박유전이 소리를 익히던 어느 날, 보성의 제암산 기슭에서 <춘향가>의 한 대목 ‘사랑가’를 익히던 중이다. 더 이상 진전이 없어 스스로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던 그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유전아! 입을 벌려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입을 벌린 박유전은 산신령이 준 팔뚝만한 쇠뭉치를 꿀떡 삼켰다. 그리고는 잠에서 깨어났다. 이후로 박유전은 목이 트여, 걸림이 없게 되었다고 한다.
25세의 나이에 전주대사습에 나가 <심청가>로 장원을 차지하여 일약 톱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전라감사의 주선으로 상경해 대원군을 만나게 된다.
그 무렵 수많은 판소리 광대의 최고 후원자였던 대원군은 특히 그의 소리를 좋아해서 “박유전의 소리가 강산(江山)에서 천하제일”이라고 추켜세우곤 했다. 운현궁 사랑채에 기거하며 대원군의 총애를 받던 그는 무과에 급제해서 선달 벼슬도 받고, 한쪽 눈을 가릴 수 있는 ‘오수경(둥그런 검은 안경)’과 ‘금토시(최고급 팔목가리개)’까지 하사 받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본바탕을 서편제 소리로 채운 후,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서편제와는 취향이 대조되는 세마치장단을 비롯해 여러 장단을 다양하게 운용하는 한편 정연한 붙임새의 기교를 더해 새로운 음악 양식인 다른 유파를 개발하는데, 그것이 이른바 ‘강산제(江山制)’이다. 그의 목청은 뛰어나게 고와서, 당시 세간에서는 안구성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소리의 기교와 속구성이 세련되고 좋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적벽가>가 장기였으며, <춘향가> 중 '이별가'와 민요 ‘새타령’을 매우 잘 불렀다.
대원군의 지극한 총애를 받던 그는 임오군란 후 왕비 민씨에게 권력을 빼앗긴 대원군이 중국으로 압송되자 민씨 일파의 보복을 피해 남으로 내려오다가, 전남 나주에서 정재근을 만나 그의 사랑채에 숨어 살게 된다. 정재근은 상당한 재산이 있는 소리꾼이었던 모양이다. 박유전은 보성읍 강산리라고 하는 곳에서 살고, 정재근은 보성군 회천면 도강재라고 하는 마을에 살면서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정재근은 박유전에게 배운 소리를 정응민에게 전해, 이 소리가 이른바 ‘보성소리’를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
보성소리는 정재근을 거쳐 그의 조카 정응민에게 전해진 박유전의 말년소리에 동편제 춘향가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으며, 동편제적 발성과 서편제적 기교를 지닌 정씨가문의 소리제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이 땅의 판소리를 완성한 박유전

박유전은 한 점 혈육도 두지 못하고 불우한 만년을 보냈다. 어느 눈 오는 날 귀가하다가 얼어 죽어서 마을 산발치에 묻히며 쓸쓸한 여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후, 사흘 동안이나 밤만 되면 마을 뒷산에서 “내 소리 받아가라!”는 혼백의 외침이 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박유전은 순창에서 태어났고 그가 이름을 날린 뒤에는 보성에서 살았다. 보성읍 강산리에는 박유전을 기념하여 무덤을 형상화한 기념비가 서 있다. 보성에 박유전의 비가 서 있는 것은 박유전이 말년을 거기서 보냈고, 또 그의 소리를 이어 발전시킨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판소리의 대가닥을 이룬 서편소리의 시조이며 말년의 소리는 보성소리의 토대가 되었으니, 판소리사에서 박유전 명창의 업적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이 크다.
박유전으로부터 시작하여 정재근-정응민-정권진의 가계로 이어지는 보성소리는 송흥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으로 이어지는 남원의 이른바 송판소리, 김성옥-김정근-김창룡으로 어이지는 김씨가문의 소리와 더불어 판소리 전승의 주요한 축이다.
소리의 신(神)은 이 땅 백성들의 애환을 안아주기 위해 가왕 송흥록을 지리산 운봉에서 키워냈다. 그런데 그것이 완벽한 것이 아니었는지, 잠시 기다리다 다시 섬진강의 다른 발원지인 복흥 자락에 박유전을 보냈다. 그것은 박유전을 통해 민족의 가장 뛰어난 유산인 판소리를 마무리 하라는 소리신의 밀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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