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분다(2)/ 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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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분다(2)/ 응시
  • 선산곡
  • 승인 2019.04.2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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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며칠 날씨가 차가웠다. 목련이 피기 시작했을 텐데 보나마나 찬 날씨에 화안이 다쳤을 것이라고 짐작만 했다. 목련은 시련이 많은 꽃이다. 봄기운에 속아 무심히 얼굴 내밀었다가 밤중에 서리라도 내리면 영락없이 다치고 만다. 다행이 그 심술이 비켜가고 날이 화창해지면 꽃잎이 지닌 품위는 별로 오래 가지 않는다. 정숙함도 잠시, 볼품없이 뒤집어져버린다. 심지어 까져버린다는 천박한 이미지로 너울거리다가 떨어진다. 그 낙화의 자리도 지저분하다. 유난히 목련의 낙화가 주시되는 것은 꽃이 지닌 한때의 정숙함 때문이다. 뒷집의 목련꽃이 피었다. 내 집 뜰에 목련은 일부러 심지 않았다. 이유는 분명했다.
수년 전 사다 심은 나무들이 이제 겨우 안착의 기미를 보인다. 작년까지도 냇가 쪽 둑에 심은 벚나무는 꽃을 피우지 않았다. 올 해 눈여겨봤더니 제법 큰 가지에 수많은 꽃망울이 맺혀있다. 드디어, 무성히 어우러지는 꽃의 향연을 펼칠 모양이다. 꽃잎은 무슨 색일까. 벚꽃이야 당연히 흰색이겠지만 멀리서 보면 약간의 푸른색이 돌았으면 좋겠다.
벚나무도 그렇지만 정작 기다리는 것은 백합나무의 성장이다. 플러터너스를 닮았지만 높은 곳 가지에 꽃을 피우는 나무다. 꽃은 튤립을 닮아 백합나무, 또는 목튤립으로도 불린다. 그 나무가 내 집 뜰의 곳곳에 서 있다.
나무는 성장했을 때의 품을 예측해 심어야한다. 나무끼리의 간격이 좁아 몇 해 전 옮겨진 몇 그루의 생육이 더뎌 내 속을 태우기도 했다. 백합나무는 어느 정도 키가 커야 꽃을 피운다. 심은 지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꽃 필 기미가 없다. 꽃은 아니더라도 크고 푸른 잎사귀를 해마다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이제 이 곳 뜰에 푸름은 가득하겠지. 그 기다림으로 바라보는 산마루 풍경은 아직 회색이다.
이 골짜기의 봄은 항상 늦다. 도심의 거리엔 가로수가 제법 푸른 잎을 돋아냈지만 이곳 나무들은 아직도 움 틔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봄은 더디 오는가. 봄이 더디게 온다한들 내게 상처가 될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상처를 지닌 듯 봄을 맞는다. 해마다 그렇게.

 

오래된 식당에 어울리지 않은 액자가 하나 걸려있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화내지 마라가 아니고 노하지 말라고 한다. 같은 말이지만 성경처럼 굳어져 우리에게 익숙해진 문구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잠언과 격언을 대하기도 하지만 자기의 삶을 그 속에서 찾지는 않는다. 그 옳은 말씀의 위해(危害)도 있다. 훌륭한 선인들의 삶이 걸러낸 결정(結晶)의 언어가 평범한 사람에게 더러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화내지 마라는 말은 그 사람의 말일 뿐이다. 살아온 세월이 허망하도록 목표가 무너지거나 이상이 속았다고 느꼈을 때, 그 뒤에 오는 슬픔과 분노의 몫은 다른 사람이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
위선 속에 사는 사람들도 많다. 룻소는 자기 자식들을 고아원에다 처박아놓고 <에밀>을 썼고 레닌은 평등을 외치면서 하인을 두고 부려먹었다. 그것도 급료도 주지 않은 채.
이상으로 포장된 언어들은 그 뜻을 쫓는 사람의 마음을 괴롭힌다.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말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나를 가장 서글프게 하는 사자성어 하나가 있다. 한 때 가장 좋아했던 말이기도 했다. ‘결기이진(潔己以進)’
식당의 액자는 제 몫을 하고 걸려 있었다. 그 벽면에 마주한 사람들을 은근히 약 올려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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