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분다(3)/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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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분다(3)/ 시절
  • 선산곡
  • 승인 2019.05.0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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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時節)

날이 화창했다.
“날씨 좋네.”
친지의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그에게 건네는 내 인사였다. 가게의 커다란 창밖으로 가로수의 투명한 잎사귀가 가냘프게 흔들리고 있었다. 녹음(綠陰)의 함성이 온 세상에 가득 차기 시작하고 있었다.
“봄이 금방 가겄소.”
그가 대답했다.
“봄은 속절없지.”
커피 한 잔 건네주는 것을 받아 들고 한참 뒤에 나는 중얼거렸다.
“투명한 저 잎사귀는 새 세상 분명한데 어찌하여 사람 가슴 서늘하게 하는지 몰라. 와작와작 가슴만 뜯어놓는 게 추억 때문이 아니야. 새봄이라서 슬퍼. 슬픈 시작.”
‘와작와작’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도 근래의 일이다. 그렇게 쥐어뜯긴 가슴이 상처라는 것도 분명했다.
“아저씨 시인인갑소.”
문득 누군가가 거들었다. 중년의 여자 손님 하나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 잘 쓰시겄소. 말씀허시는 걸 보니.”
몇 마디 건넬 시간도 없이 여인은 자기말만 한 뒤 가게를 나갔다. 짧은 순간 사라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우리는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넋두리가 시(詩)였을까. 어울리지 않는 빛바랜 탄식은 어떤 상처가 불러온 것일까. 탄식을 부르는 상처도 그 자리에 멈춰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마음을 그녀가 화답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새벽부터 내린 비 때문이었는지 기온이 쌀쌀했다. 늘 앉았던 의자가 비에 젖은 것을 본 우리는 방금 산 뜨거운 커피를 들고 다시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 사람들이 오가는 편의점 밖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셨고 노트북을 펼쳤다. 장장 두 시간, 정해진 요일마다 해 온 일이었다. 무료를 이기기 위함보다는 한숨을 감추기 위한 행위였다. 글을 쓰거나 잡문을 정리하는 동안 어느 누구 하나 내 모습을 눈여겨보지 않아 다행이었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일어서서 자리를 바꿔 앉았다. 편의점문을 마주한 자리 반대편에서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어깨를 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어떤 사람과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눈치 챈 아내가 그의 동선을 확인해주는 동안 제발, 내가 앉은 자리 쪽으로 그가 오지 않기를 빌었다. 다행히 그는 간단한 물건 하나 사서들고 편의점을 나갔다. 몇 해 동안 근심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그가 지닌 고통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도 나처럼 만남을 경계하는 통증을 분명히 지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증의 깊이는 달라도 빛깔은 아마도 똑 같았을 것이다. 직접 마주치지 않았지만 여기서 그를 보게 된 것은 너무 우연이었다.
만약 그와 눈이 마주쳤더라면 우리는 서로 어떤 표정이었을까. 평소처럼 편의점 밖에 앉아있었다면 영락없이 들키고 말았을 서글픈 내 근황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 동안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공간에서 나를 너무 쉽게 노출했었음을 깨달았다. 이 장소에서 누군가가 나를 먼저 알아보고 몸을 숨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음을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봄은 왜 이런 빛일까. 이 봄은 왜 이런 통증을 무심하게 지켜보고만 있을까. 시절은 또 하나의 상처를 겹쳐놓는다. 그 상처 훗날 약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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