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8) 금과면 삿갓대 출신 장판개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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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8) 금과면 삿갓대 출신 장판개 명창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5.0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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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과 학순 장판개 명창 추모비. <순창군청 사진>

근세의 판소리 명창 장판개(張判盖, 1886년~1937)는 장석중(張石中)과 이금화(李金華) 사이,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내 김옥란(金玉蘭)과의 사이에 4남을 두었으며, 호는 학순(鶴舜)이다.
장판개 명창 출생지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곡성 출신으로, 위키백과에는 순창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고, 순창군청 홈페이지에는 금과면 연화리 삿갓대 마을(현 내동리 연화마을)로 기록하고 있다.
장판개 명창의 친조카(동생 장도순의 딸)인 장월중선 명창은 1996년 3월 7일 경주시 국악협회 경북지부 신라국악예술단 사무실에서 있었던 노재명 국악음반박물관 관장과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나는 1925년 4월 20일에 곡성군 오곡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도순은 순창 출신으로 판소리를 잘 하셨다 하는데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 위로는 형 장판개 명창, 아래로는 남동생 장길순 씨, 여동생 장수향 씨가 있었다. (중략) 나는 7세부터 5년 동안 순창과 곡성에서 큰아버지인 장판개 명창에게 단가 <만고강산>, 판소리 <춘향가>ㆍ<적벽가>ㆍ<심청가>ㆍ<수궁가>ㆍ<흥보가>를 배웠다. 작은아버지 장길순 씨는 순창 출신으로 농사를 지었으며 둘째 고모 장수향 씨 역시 순창 출신으로 백부인 장판개 명창에게 판소리를, 박상근 명인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타고난 목소리의 만능 소리꾼

 

장판개의 조부 장주한과 부친 장석중은 거문고의 명인이요 판소리 명창으로 모두 참봉 벼슬을 받았다. 예인(藝人)의 피를 타고난 장판개는 어릴 때부터 부친의 소리를 듣고 그대로 방창하여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처음에는 줄타기를 했는데, 줄을 타다가 떨어진 일이 있은 뒤로는 고수(鼓手)로 돌아섰다. 15세 때부터 김채만의 수행고수로 북을 치고 소리를 배우다가 당시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던 송만갑을 스승으로 모시고 3년 동안 <춘향가>ㆍ<심청가>ㆍ<흥보가>ㆍ<적벽가> 등 네 바탕을 연마하였다.
그 후 순창의 산사(山寺)에 들어가 2년 간 독공을 한 후 스승 송만갑의 실제적 기예와 표현 동작을 견문하기 위해 2년 동안 그의 수행고수로 있으면서 절차탁마하여 소리로도 일가를 이루었다. 그리고 김세종에게 <춘향가>를 배우고, 박만순에게 <적벽가> 등을 배웠다.
장판개는 <적벽가>를 잘하였다고 하며, 그의 더늠은 <흥부가> 중 ‘제비노정기’이다. 장판개의 <흥부가>는 복흥면 하리 출신의 성운선(1928∼1997)에게 이어졌다.
“청미함과 우람함을 겸비한 장판개의 음성은 최하의 저음에서 최상의 고음까지 자유자재로 마구 구사하는 기예의 절륜은 가왕 송홍록 이후의 독보”라고 박황은《판소리소사》에서 말하고 있다.
“수리성(후천적으로 닦은 목소리)보다는 천구성(타고난 목소리)이 남달랐다. 상성부 통성이 얼마나 힘이 넘쳤는지 판소리 중 최고 절정고음부인 ‘서슬’을 칠 때면 장지문의 문고리가 떨릴 정도였다”고 손녀뻘(동생 장도순의 외손녀)인 정순임 명창은 회고한다.
장판개는 소리뿐 아니라 북ㆍ해금ㆍ거문고ㆍ피리에도 능통해 20세 전후 그 명성이 삼남 일대에 자자했다. 장판개의 소리는 호남보다 경주, 안동 등 경상도에서 더 알아주었다.
판소리 하면 호남인 줄 아는데 실은 그게 아니다. 전주대사습에서 장원한 명창도 경상감영의 선화당에서 소리하여 인정받아야만 서울 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다. ‘전라도에서 공부해서 경상도에서 발판을 마련해 서울에서 명창이 된다’는 말이 판소리계의 지론이다. 동편제를 창도한 송홍록을 비롯해 박기홍, 서편제의 명수 유성준과 김창환, 박동진도 모두 대구ㆍ경북에서 활동했다.
19살이었던 1904년 7월 어전(御前)에서 장기인 <적벽가>를 불렀는데, 청미하고 풍부한 성량으로 뛰어난 기예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멋과 귀태가 넘치는 발림으로 고종을 비롯한 삼정승 육판서를 혼취케 하였다. 소리가 ‘장판교대전’ 대목에 이르자 실전을 방불케 하는 신출귀몰한 묘기에 좌중은 탄성을 연발하였다. 당시 고종은 그 재능을 가상히 여겨 종9품 벼슬에 해당되는 ‘혜릉참봉’을 제수한다.
장판개는 1904년에 스승 송만갑의 부름을 받고 원각사(圓覺社) 무대에 출연했고, 원각사가 폐쇄된 후인 1908년에는 송만갑협률사에 가담해 전국을 돌며 공연에 참가해 제자인 여류명창 배설향과 함께 큰 인기를 모았다.

4대째 이어지는 ‘판소리 명가(名家)’

‘한 집안에서 3대 정승 나기보다 3대 명창 나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한 집안에서 3대에 걸쳐 명창이 나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4대째 이어지는 장판개 명창의 가계가 문화관광부 선정 첫 번째 ‘판소리 명가(名家)’가 되었다.
장판개 집안의 소리는 거문고 명인이었던 부친 장석중, 장판개, 동생 장도순과 장도순의 딸 장월중선(경북도 무형문화재 제19호), 장월중선의 딸 정순임(무형문화재 제34호)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지난 2007년 문화관광부로부터 ‘판소리명가 1호’로 지정받았다.
장판개의 아우인 장도순은 장월중선 명창의 부친으로 판소리 명창이자 8잡가꾼으로 유명했다. 여동생인 장수향은 소리는 물론 가야금ㆍ거문고ㆍ무용에 두루 능했다.
이화중선이 출현하기 전까지 최고의 여자 명창이었던 배설향은 어릴 때부터 장판개 명창이 가르친 수제자이자 말년에는 아내가 된 예술적 동반자이기도 하다.
장판개 명창은 조카딸(아우 장도순의 딸)인 장월중선(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9호)의 재주를 특히 아꼈다. 장월중선이 일곱 살이 되자 납치하다시피 데려가 배설향에게 맡기면서 “네 딸 삼아 가르치라”고 했던 것.

장판개 명창의 자취

어느 날 장터에서 약장수, 엿장수들이 나발 모양의 빅타 축음기로 스승인 송만갑이 취입한 레코드를 마구 틀었다. 이를 본 장판개는 “소위 국창(國唱)의 소리를 장바닥에서 저렇게 함부로 틀어대니 난 취입하지 않겠다”며 한사코 레코드 취입을 거부했다. 이에 임방울이 “선생님 같은 대가가 없는데, 판을 찍어 후세에 남겨야 합니다. 일본 구경 겸 가십시다” 하며 설득해 죽기 몇 해 전인 1935년에 판소리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 <적벽가> 중 ‘조조가 관운장에게 비는 장면’, 단가 <진국명산> 등 7~8편을 일본에서 녹음해 음반으로 남겼다. 이 음반에는 젊은 나이에 아편으로 목이 망가진 장판개 명창이 죽음을 앞두고 전력을 다한 소리가 담겨져 있다.
장판개 명창은 명고수이기도 해서 임방울 판소리 <적벽가> 유성기음반에 고수로 참가해 녹음을 남기기도 했다.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 김명환 고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장판개 선생 장단, 내가 다 숭내를 못허겄어요, 가락하고 배합이 맞어 갖고 때릴 때만 한 번씩 때리는디 기가 막히게 멋있어요. 추임새를 기가 막히게 하는디 성음을 숭내럴 못내요. 아무도 없을 때는 거울 보고 자꾸 해보는디 장 선생 같이 되들 안 해. 죽어도 안 돼.”
장판개는 스승인 송만갑 못지않은 기량을 가졌고, 큰 음량과 뛰어난 기량으로 당시 청중을 휘어잡아 선배 명창들도 함께하기를 꺼릴 정도였다. 많은 이들이 그가 좀 더 오래 살아서 중앙에서 활약했으면 당시 판소리의 판도가 달라졌을 것으로 애석해 하기도 한다.
장판개는 아편으로 몸이 상해 순창 금과면에서 기생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다 1938년 8월 16일(1937년) 53세를 일기로 소리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 이듬해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배설향 명창도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장판개 생가. 연화마을 삿갓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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