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9) 판소리 여왕들과 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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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9) 판소리 여왕들과 순창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5.2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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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채선, 배설향, 이화중선

판소리는 본래 무당가계 남자들의 창조물이었기 때문에 여자들이 판소리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신재효 문하에서 최초의 여류명창 진채선이 배출되었고 이어 허금파ㆍ김녹주ㆍ배설향ㆍ이화중선ㆍ박녹주ㆍ김소희 등이 큰 인기를 얻게 되면서 오늘날에는 여자 명창들이 더 많이 활동하게 되었다.
구한말부터 식민지시대까지 조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진채선, 배설향, 이화중선은 순창 출신들은 아니지만 우리 순창과 깊은 인연이 있는 여류 명창들이다.

 

▲김세종 명창에게 지도 받은 진채선.

김세종에게 지도 받은,
최초 여자 소리꾼 진채선

 

19세기 후반, 공식적인 최초의 여자 소리꾼이 등장했으니 바로 진채선(陳彩仙, 1847∼?)이다. 진채선은 유년시절에 당골 학습을 하는 어머니를 따라 다니면서 익힌 노래 솜씨가 당골 학습 선생에게 알려져 소리지도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진채선은 소리를 가르치던 선생이 다리를 놓아주어 신재효의 문하에 들어가 신재효의 각별한 배려 속에서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게 된다.
이때 체계적으로 소리를 가르친 사람이 바로 신재효의 집에서 소리 사범 노릇을 한 동계면 가작리 출신, 김세종 명창이다. 진채선은 특히 <춘향가>와 <심청가>를 잘 불렀는데, 남성 명창들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었다. 독자적인 더늠을 가지고 있었고, 사설 창작 능력과 출중한 연창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으며, 즉흥적으로 소리판을 장악하는 솜씨도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소리공부를 마친 진채선은 1867년 한양으로 올라가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에 참여하는데, 이때 진채선을 데리고 간 사람도 김세종이었다.
낙성연 잔치에 참가한 진채선은 <춘향가> 중 ‘사랑가’와 신재효가 손수 지은 <성조가(成造歌)> 등을 불렀는데, 좌중은 진채선의 고운 외모와 춤 솜씨, 빼어난 절창에 매료되었다. 공식적인 여류 명창의 출현이었다.
판소리에 일가견이 있던 흥선대원군은 진채선의 공연을 보고 매우 흡족해 하며 그녀를 대령기생으로 임명했다. 그 후 그녀의 판소리 실력은 운현궁의 대령기생이라는 한계 상황에 가로막혀 안타깝게도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했다. 대원군 실각 후 확인되지 않은 풍문만 전해지며 진채선은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가 닦아놓은 길이 있었기에 일제 초기에 활동했던 많은 여성 명창들이 소리꾼의 길을 갈 수 있었다.

 

▲장판개 명창의 반려자, 배설향.

장판개 명창의 제자이며
반려자, 배설향

 

1895년 남원에서 태어난 배설향(裵雪香, 1895∼1938)은 어려서부터 목소리가 맑은데다 음악적 감각도 뛰어나 한 번 들은 소리는 바로 기억해 그대로 따라 불렀다. 이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그에게 자주 소리를 시켰다. 얼굴도 예쁜 배설향의 재능이 음악 쪽으로 나타나자 그의 어머니는 그를 명창으로 키우기 위해 당시 순창에서 활약하고 있던 금과면 삿갓대 출신의 장판개 명창에게 보내 소리공부를 시켰다.
12세 때 장판개에게 <흥보가>ㆍ<춘향가>ㆍ<심청가>ㆍ<수궁가> 네 바탕을 배웠다. 타고난 소질이 있어 판소리에 입문한 지 불과 5년여 만에 판소리 본질을 터득하는 등 빠른 향상에 스승인 장판개도 놀라워했다. 1915년 서울로 올라가 장안사ㆍ연흥사 등의 창극 공연에 장판개와 함께 출연, 여류명창으로 그 이름을 크게 떨쳤다.
대중의 인기가 크게 오르자 송만갑은 자신이 이끌고 있는 창극단 협률사의 단원으로 배설향을 영입해갔다. 배설향은 협률사에서 송만갑은 물론 이동백 등 국창들의 뛰어난 기예를 직접 보고 들으면서 실력을 연마해 나갔다.
배설향은 얼굴이 가냘파 보였지만 성량이 풍부하고 음색도 매우 씩씩해 소리만 들으면, 마치 목소리 고운 남자의 소리처럼 소리가 크고 음색도 분명하고 선명했다. 그녀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 갔고, 공연이 끝나면 그를 보려는 인파가 무대 위까지 몰려와 창극단 측은 공연 때마다 특별 경비를 세울 정도였다.
배설향은 서울에서 활약하다 장판개와 함께 전주를 거쳐 경북 경주권번에서 소리선생을 지내고, 1935년 순창으로 귀향해 함께 살면서 조카딸 장월중선에게 흥보가와 가야금산조를 가르쳤다. 장판개가 병사한 그 이듬해인 1938년 배설향도 스승이자 남편이었던 장판개를 잃은 슬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배설향의 나이 43세였다.

 

▲적성 매미터에서 공부한 이화중선.

적성 매미터에서 공부해
조선을 뒤흔든 이화중선

 

일제강점기 최고의 여류 판소리 스타였던 이화중선(李花中仙, 1899∼1943)은 호적에 의하면 1899년 9월 16일 전남 목포 출신으로 되어 있다. 본명은 이봉학(李鳳鶴). 소리꾼 이중선이 그녀의 동생이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전남 보성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열세 살까지 살았다. 다음에 옮겨간 곳은 남원이다. 17세 때 남원 수지면 박씨 가문으로 출가했다.
평범한 아낙네였던 이화중선은 1918년 어느 날 송만갑ㆍ유성준의 협률사 공연을 구경하게 된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판소리에 넋을 잃고 소리를 배우고자 봇짐을 싼다.
소리의 길을 찾아 남원 수지면 장국리에 살고 있던 장득진에게 판소리를 배운다. 장득진은 미남 명창 장재백의 조카로 소리꾼이자 거물무당이었다. 적성면사무소에 보관된 장득진의 호적에는 1917년에 장득진(당시 33세)이 남원에서 순창 적성면으로 이사했고, 이화중선이 첩으로 올라가 있다.
이화중선은 동생 이중선과 함께 적성면 운림리 매미터에 기거하면서 장득진에게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등을 배웠다. 매미터는 판소리 명창들의 득음을 향한, 하루 종일 끊이지 않고 들리는 소리가 매미 우는 소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 노인들은 자신들이 어렸을 적에 “이화중선이 이곳에서 살면서 다른 무리들과 앞산을 돌며 북과 장구에 맞춰 소리를 하는가 하면, 마을 입구 꾸지나무에다 줄을 매고 그 패거리들이 줄타기를 하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고 증언했다. 대략 1920년대 초반의 일인 듯하다.
이후 장득진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소리를 알게 해준 협률사 창극단으로 들어가 송만갑, 이동백 등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가 주최한 ‘전국판소리대회’가 경복궁에서 열렸다. 이화중선은 이날 대회에서, <심청가> 중 황후가 된 심청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탄식하는 대목인 ‘추월만정(秋月滿庭)’을 불러 그때까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배설향을 압도해 이후 최고의 여성 판소리 창자로 군림하게 된다.
당시 ‘소리의 왕’이라고 불리던 박기홍은 일등으로 뽑힌 이화중선에게 “배설향이 여왕이라면 이봉학 자네는 가히 꽃 중의 선녀로세. 그러니 ‘꽃중의 선녀’라는 뜻으로 ‘화중선(花中仙)’이라 함은 어떨까?” 이때부터 이화중선이라는 예명으로 불리게 된다.
작고한 인간문화재 김소희 명창은 “이화중선의 <심청가> 한 대목을 듣고는 온통 혼을 빼앗겼다. 그녀가 30대 때 그녀 앞에서 다른 여류 명창들은 입도 못 벌렸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화중선의 출현은 판소리사에 가히 혁명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여류 명창이 대거 출현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해 준 이가 바로 이화중선이다. 이화중선 등장 이후 제2의 이화중선을 꿈꾸는 여류 명창들이 나왔고 그 숫자나 인기 면에서 남자 명창들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한 점 혈육도 없이 신병을 앓아 평소 자주 비탄에 잠겼던 그녀는 1943년 일본 공연을 마치고 배로 이동하던 중 아무도 모르게 갑판으로 올라가 바다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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