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현대사(1) 1960∼1963년 대중가요와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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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현대사(1) 1960∼1963년 대중가요와 한국사회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5.3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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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와 함께 살펴본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 (1)

역사학자들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꼽는다. 시민혁명(프랑스혁명ㆍ영국명예혁명ㆍ미국독립혁명)으로 인권과 근대 민주주의가 자리 잡았고, 산업혁명으로 상품의 대량생산과 자본주의 제도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 지향했던 민주주의와 근대화가 우리 역사에서 우리 손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때가 바로 1960년대다. 4ㆍ19혁명으로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실현하기 시작했으며, 비록 여러 모순과 문제점으로 점철되긴 했지만 5ㆍ16쿠데타 이후 본격적으로 산업화가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오늘은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유포되고 수용되는 대중가요 속에는 우리네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한 시대에 유행한 대중가요는 당시 사회의 단면을 읽는 중요한 거울이기도 하다.
《대중가요와 함께 살펴본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 연재에서는 우리 역사에서 진정한 근대화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1960년대 이후부터 2000년까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당시 유행했던 대중가요를 통해 연도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1960년대의 세계사적 흐름

1960년대는 경제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전 및 성장기의 과정을 거친 시기였다. 한국전쟁 이후 잠시 조용하던 냉전이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로 다시 격해지기 시작했고 베트남 전쟁(1964.8∼1975.4)은 60년대 내내 미국을 괴롭혔다. 또 민권운동이 격렬해지고 존 에프 케네디,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와 맬컴 엑스가 암살되는 격동의 시기이기도 했다.
1964년 영국 4인조 밴드 비틀스의 순회공연에서는 오빠 부대가 괴성을 지르고 기절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미국 젊은이들은 그들의 헤어스타일과 패션을 흉내 냈고 거칠고 반항적인 매너를 자신들의 롤 모델로 삼았다. 밥 딜런으로 대표되는 포크송도 인기를 끌었고,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사이키델릭 음악이 유행했으며 이와 더불어 히피 문화가 맹위를 떨쳤다.

 

대한민국의 1960년대

 

한국의 1960년대는 4ㆍ19혁명과 5ㆍ16쿠데타의 연속과 불연속, ‘빵’(평등에의 욕구)과 ‘자유’(개인주의화의 욕망) 사이의 모순, 박정희와 김일성의 적대적 공생이 계속되는 시기였다.
6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자유와 반공을 동시에 부르짖으며 살았고, 민족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열렬히 서구를 추종했다. 또한 박정희의 철권통치로 사회ㆍ문화가 전반적으로 ‘군사화’, ‘남성화’ 되는데도 대중의 문화적 능력과 여성의 역할이 증대했다. 황금만능주의ㆍ경제 제일의 이데올로기가 수많은 속물과 졸부를 곳곳에 등장시켰음에도 저항의식과 인문학적 교양이 함께 커가는 드라마적 변증법이 펼쳐지던 시대였다. 그리고 대일 외교굴욕에 맞섰던 6ㆍ3 항쟁(1964년 6월)을 통해서 반일감정을 뿌리 깊게 이어나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진정한 대중가요의 출발, 1960년대

1960년대는 한국 대중가요계가 상업적인 성과와 시장성이 커진 최초의 시기였다. 식민지시대부터 대중들의 인기를 끌어온 트로트에 신민요, 미8군 출신 가수들의 음악 등 음악의 장르가 다양해졌다. 많은 가요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진정한 한국가요계의 시작이라 일컫는 시기가 1960년대이다.
트로트가 여전히 인기를 끌었으며 이 중심엔 국내 가수 최초로 10만장의 앨범을 판매한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가 있었다. 또한 미8군 출신으로 대표되는 스탠다드 팝 위주의 장르를 부르던 가수들이 큰 활약을 보였다. 패티김과 같은 가수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1960~1963년의 사건과 인기가요
<노란 샤쓰의 사나이>ㆍ<밤안개>ㆍ<빨간 구두 아가씨> 등 유행

 

1960년은 민주화 혁명의 해였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시민혁명인 4ㆍ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의 제1공화국이 무너지고, 의원내각제와 양원제 국회를 채택한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의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1월 1일자로 대한민국 민법이 시행된 해이기도 하다.
이 해에 유행한 노래는 송민도가 부른 <카츄사의 노래>(80년대에 김부자가 리메이크), 남일해의 <이정표>, 김용만의 <남원의 애수>, 박재란의 <푸른 날개>가 있었다.

1961년은 5ㆍ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해이다. 민간정부인 제2공화국이 출범 1년도 안 되어 종식되고, 이로 인해 고려 무신정변 이후 800여 년 만에 군정이 시작되었다.
이 해에는 한명숙의 <노란 셔츠의 사나이>, 박재란의 <럭키 모닝>, 최희준의 <우리 애인은 올드미쓰> 등이 인기를 끌었다.
1961년에 발표된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그야말로 태풍처럼 우리나라를 휩쓸었다. 그동안의 가요 형식을 탈피해 스윙 리듬의 미국 서부 컨트리 스타일 힐빌리를 모방해 리듬감이 경쾌하고 가사도 직설적인 화법을 취해 신선한 느낌을 줬다. 우리나라 가요 중 동남아 등 외국에서 히트한 최초의 노래인 이 곡은 한명숙의 출세작이기도 하다.

 

▲가수

1962년은 우리나라에서 단기 대신 서력이 공식 연호로 사용된 첫 해였고, 쿠바 미사일 위기로 제3차 세계대전이 터질 뻔 했던 해였다. 미국의 섹시 심벌 마릴린 먼로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국내에서는 식민지시대 가요계의 황제로 군림했던 남인수가 사망했다.
1962년을 장식한 노래들은 여성 가수의 노래가 많은데 <호반의 벤치>(권혜경), <밤안개>(현미), 번안곡 김치켓의 <검은 상처의 부루스>,그리고 남일해의 <첫사랑 마도로스> 등이 유행했다.

 

 

▲가수 남일해.

1963년은 제3공화국이 수립되고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당선ㆍ취임해 본격적인 박정희의 철권통치가 시작된 해다. 미국 대통령 존 에프 케네디가 괴한의 총격으로 암살당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강원도 인제에서 일가족 5명을 도끼로 살해한 ‘고재봉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국내 첫 라면인 삼양라면이 출시된 해이기도 하다.63년도에 히트한 노래에는 <빨간 구두 아가씨>(남일해), <우리 마을>(한명숙), <님>(박재란), <황혼의 엘레지>(최양숙), <사랑이 메아리 칠 때>(안다성) 등이 있었다.
1960년대 이후 한국가요사에서 남자가수의 인기계보는 남일해-최희준-남진-송창식-조용필-서태지로 이어진다. 남일해는 60년대 초반 최희준, 박재란, 한명숙, 현미, 이미자 등과 더불어 한 시대를 풍미했다. <빨간 구두 아가씨>는 정열의 붉은 색 구두를 신고 걸어가는 여성을 소재로 삼아 만들어진 노래로 제목부터가 이색적이다. 저음의 굵직한 목소리와 4분의 4박자 스윙 조의 경쾌한 멜로디는 한창 경제개발을 하려는 활기찬 시대 흐름과도 맞아떨어져 히트할 수 있었다.
한명숙, 현미와 함께 1960년대 여가수 트로이카였던 박재란은 긍정적이고 밝은 노래로 당시 애상적이고 향토적 정서가 주류를 이루던 트로트 가요계에 신선한 파문을 일으켰다. 1950년대 말에 발표한 <산 너머 남촌에는>, <밀짚모자 목장아가씨>, 번안곡 <진주 조개잡이> 등의 노래로 정치적 격변기(4ㆍ19와 5ㆍ16)에 피곤한 정치 현실에 찌든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사랑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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