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10) 순창 소리판 지켜낸 진정한 명창‘ 박복남
상태바
순창인물(10) 순창 소리판 지켜낸 진정한 명창‘ 박복남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6.04 15: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계 이동에서 태어나 적성 매미터에서 소리를 배웠던 박복남 명창.

박복남(朴福男, 1927~2004) 명창은 1927년 4월 15일 동계면 이동리에서 아버지 박춘봉과 어머니 김막동 사이에서 2남 3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정읍ㆍ여수ㆍ순창국악원 등에서 40여년간 소리선생으로 후학 양성에 정열을 쏟아오다가 2004년 3월 4일 새벽 4시, 78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임실군 강진면 국립 임실 호국원에 안치되어 있다. 딸 미선은 제26회 목포 전국 국악경연대회에서 판소리 <수궁가> 중 ‘약성가’로 명창부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전라북도 도립국악원 창극단 수석을 거쳐 현재 도립국악원 판소리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장남 종호와 차남 종훈도 전국고수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자녀들이 판소리 명가를 계승하며 국악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동편제 판소리 대가로 무형문화재였던 박봉술 명창은 박복남의 사촌 형이다.
 

 

12살에 소리 수업 입문

박복남은 일곱 살 되던 해에 적성면 운림리 매미터로 이사했다. 매미터는 후기 8명창 중의 한 사람인 장재백 명창을 비롯해 장득진과 결혼한 이화중선이 소리를 배워 당대 명창으로 이름을 날려 유명해진 곳이다. 수많은 소리꾼들의 소리로 새벽까지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박복남이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열두 살 되던 해였다. 박복남이 본격적인 소리꾼으로 대성하기를 바라던 아버지가 당시 송정리에 살고 있던 소리꾼 박삼룡을 집으로 모셔다가 소리를 배우게 했다. 박삼룡은 박복남의 이종사촌 형으로, 당시 27세의 젊은 나이였으나 소리는 상당히 잘했던 유성준의 제자였다. 이때부터 박삼룡에게 유성준(劉成俊) 바디(판소리에서 명창이 스승으로부터 전승하여 한 마당 전부를 음악적으로 절묘하게 다듬어 놓은 소리) <수궁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14세 때에는 주광덕(朱光德)을 집으로 모셔다가 <흥보가>와 <심청가>를 배웠다. 주광덕은 전남 담양 출신으로, 크게 이름을 얻은 소리꾼은 아니지만 전라남도 일원에서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 활동하던 서편제 소리꾼이었다.
15세 때에는 당시 전남 장흥에 머물고 있던 이동백(李東伯)을 찾아가 단가 두 편을 배웠다고 하는데, 하나는 <경산경가>로 알려진 것이고, 또 하나는 <인생수기>라는 곡이다. <경산경가>는 일제 강점기부터 유명한 단가로, 현전하는 유성기 음반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는 곡이다. 그러나 <인생수기>라는 단가는 이동백의 창작곡이라고 전한다.
따라서 박복남의 판소리는 유성준ㆍ박삼룡으로 이어지는 동편제와 주광덕에게 전수된 서편제, 그리고 이동백에게 배운 중고제(中高制)가 하나로 어우러진 독특한 판소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그의 소리 세계가 풍성하다는 말로 귀결될 수 있다.

엿장수와 유랑극단 생활하며
도전한 명창의 길

소리 수업을 마친 박복남은 여수ㆍ정읍ㆍ부안ㆍ순창 국악원 소리 선생을 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그러나 소리 선생을 하기 전, 먹고 살기 위해 엿장수도 하고 유랑극단도 따라다녔다. 생계를 위한 고육지책이었지만 후에 박복남은 유랑극단, 약장수 등을 따라다녔던 일을 후회했다고 한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유성준 바디를 지켜 냈던 박복남은 1970년대 전주 대사습놀이가 부활되었을 때 출전하지만 탈락했다.
1995년 70세가 다 된 나이로 전주 대사습놀이에 다시 도전해 많은 명창들로부터 박수를 받았지만 결선에서 탈락했다. 이듬해인 1996년 전주 대사습놀이에서 판소리 부문 차상을 받았고, 같은 해 서울에서 열린 제3회 서울 전국 판소리 명창 경연 대회에서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98년 72세의 나이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43호(<수궁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박복남이 보유하고 있었던 유성준 바디의 <수궁가>는 ‘육지에 온 자라가 토끼를 처음 만나 문답하는 대목’이 유명한 것으로,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 대표적 더늠(판소리에서 명창이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부르는 어떤 마당의 한 대목)으로 소개되어 있다. 또한 동편제 <수궁가> 특유의 장중하고 온화하면서도 씩씩하고 웅장한 가운데, 그 창법에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선천적인 음량을 소박하게 드러내는 특징을 지녔다. 힘이 있고 거칠면서도 밀고 당기는 소리의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수궁가>의 원형 간직한 소리꾼

박복남이 훌륭한 소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최동현 전 군산대 국문학과 교수는 “다른 소리꾼들과 별다른 교류가 없었으며, (이동백에게 단가를 배우긴 했지만) 후에 소리를 그만둔 소리꾼을 스승으로 두었다는 것이 그에게 가장 큰 제약이었다”며 “앞에서 끌어 줄 사람이 없었고, 동문수학한 사람들도 없었으며, 곁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었던 점이 그가 가지고 있는 기량에도 불구하고 일찍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유성준 바디의 <수궁가>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된 박복남은 유성준의 생애와 많은 부분이 유사해 보인다. 이를테면 유성준이 고제(古制) <수궁가>의 원형을 지켜 온 명창이지만 근대 5명창이었던 김창용ㆍ김창환ㆍ송만갑ㆍ이동백ㆍ정정열의 그늘에 가려 제 빛을 내지 못하다가 후대에 그의 소리 세계가 고색창연한 빛을 발휘한 점과 박복남이 70세가 넘어 이른바 명창 반열에 오르고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그의 음악 세계가 열렸다는 점에서 그렇다.
박복남이 간직한 소리 계보를 정리하면 송우룡→유성준→박삼룡→박복남으로 이어진다. 순창 판소리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박복남의 스승인 유성준이 처삼촌 되는 순창의 장재백으로부터 소리를 배웠고, 구례의 송우룡 문하에서 연마하여 일가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순창 판소리 맥이 박복남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늦게 평가된 소리꾼이지만 진정한 소리로 말년에 꽃피웠던 박복남은 <수궁가>의 원형을 간직했던 인물로 이름이 높았다. 여러 무대에서 완창 <수궁가>를 녹음하기도 한 박복남은 판소리의 음색이 정아하고 독특하며 고성의 기량이 뛰어날 뿐더러 반평생 넘게 공을 들인 득음의 경지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는 탄탄한 성음과 치열한 공력으로 동편제ㆍ서편제ㆍ중고제를 아우르면서 한평생 우리 음악을 지켰던 예인이었다. 박복남은 순창에서 태어나 순창에서 살며 순창을 중심으로 소리판을 지켜 낸 진정한 순창의 명창이었다.

순창의 판소리

순창은 판소리의 양대 유파인 동편제 소리의 또 다른 맥을 이어왔고 서편제 소리를 탄생시킨, 판소리의 또 하나의 고향이다. 19세기 말까지는 순창의 소리가 잘 전승되었지만, 20세기 이후에는 순창에서 발생한 소리들이 순창에서는 잘 전승되지 못했다. 그러나 순창에서 발생했던 소리가 현대에 와서 가장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보성소리로 남아있는 것은, 순창에서 발생한 판소리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순창은 장영찬ㆍ성운선ㆍ박복남 등의 소리꾼들을 끊이지 않고 배출하면서, 판소리 양대 유파의 발생지로서의 옛 영광을 희미하게나마 이어왔다. 이제 다시 판소리를 부흥시켜 옛 영광을 되찾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순창 농부]농사짓고 요리하는 이경아 농부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이러다 실내수영장 예약 운영 될라”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