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분다(6)/ 육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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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분다(6)/ 육필
  • 선산곡
  • 승인 2019.06.19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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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표시를 위해 작은 라벨지에 글자를 썼다. 조사 하나 너무 크게 써져 마음에 들지 않는다. 라벨에 쓴 이 글씨를 남이 보는 것도 아니고 볼 일 또한 없다. 그런데도 글씨가 전체적으로 어울리느냐 어울리지 않느냐가 문제다. 가끔 있는 일이지만 이런 경우 다시 쓰기를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글씨를 쓸 때 어떻게 써야한다는 구상은 누구나 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만의 숙련된 표현이 반복되어 굳어진 게 그 사람의 필체다. 내가 쓴 글씨는 어느 부류에 들어갈까. 큰 종이에 붓으로 쓰는 글씨는 예외겠지만 기록을 위한 글씨쓰기의 속도가 남보다 빠른 편이어서 평소 달필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덕분에 성질 값한다는 글씨체라고도 했고 개성이 강해 산곡체라고 명명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 말이 마냥 싫지는 않았다.
누구나 자기의 손에 맞는 필기구가 있다. 내게는 펜이 가장 좋은 필기구였다. 언젠가 흑연을 카드리치에 끼어 쓰는 샤프 펜으로 글자를 써본 적이 있었다. 두 자를 이어 쓰지 못하고 부러지기만 했다. 내가 평소 힘을 주어 글씨를 쓴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필기구를 꽉 쥐는 습관에 필기구 끝에 적지 않은 압력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펜을 선호한 영향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영영 샤프 펜을 손에 쥐지 않았다.
펜촉은 굵어야했다. 새로 산 펜촉은 사포에 문질러 속성 길들이기를 했다. 원래 펜은 45도 기울기로 잡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세관현상이 어긋나 글씨가 써지지 않는다. 펜글씨는 곧 필기구를 바르게 잡는 훈련이었다. 요즈음 다양한 필기구들이 등장한 뒤로 사람들은 펜과 잉크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컴퓨터의 등장으로 글씨를 쓸 일도 줄어들었다. 학생들의 글씨가 해마다 악필에 가까워지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 경험도 이미 오래 전에 한 일이다. 펜(연필) 쥐는 훈련을 하지 못했으니 필기하는 손 모양도 각양각색으로 변해버렸다. 그들이 쓴 글씨가 어느 수준에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최근에 내 필기구는 만년필이다. 펜을 잉크에 찍지 않고 길고 오래 쓸 수 있으니 곧 휴대용이다. 그 만년필도 펜처럼 45도 각도로 쥐어야 한다. 펜글씨를 써보지 못한 사람들이 만년필을 잘 사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들이 취업기념으로 만년필을 선물하겠다는 말에 기꺼이 촉이 굵은 것이면 된다고 했다. 얼마 후 유명산 이름에 눈(雪)이 로고인 회사의 제품을 손수 내밀어 내 입이 벌어지게 했다. 복사용지의 뒷면까지 잉크가 배어나는 최대 굵기에 아주 만족해했는데 이번엔 아내가 촉 굵기가 조금 낮은 같은 상표의 만년필을 선물해 주며 한 마디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고, 특히나 육필쓰기를 좋아하니 드리는 선물이요.”
몇 자루인지 모르지만 아주 많은 명품만년필을 늘어놓고 그날 써야할 주제를 생각하며 한 자루 골라잡아야 글이 잘 써진다는 어느 민속학 교수의 칼럼을 본 모양이었다. 2개나 되는 만년필을 번갈아 쓰며 호사를 누리게 해준 것도 사실이지만 육필쓰기를 좋아하는 평소의 습성을 알고 이해해준 아내의 마음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잉크병 주둥이에 잉크의 수액을 조절하고 하얀 백지에 글자를 쓰는 펜의 촉감, 검정 잉크만 써 온 평생의 버릇 때문에 펜을 쥔 손가락에 언제나 먹물이 묻어있었다. 그 흔적이 그다지 싫지 않았던 펜글씨 쓰기도 이젠 내게서 멀어졌다. 그래도 헛발질(?) 없이 줄줄 육필을 쓸 수 있는 만년필이 있으니 행복이라면 행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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